[혜윰노트] 넌 마치 화산처럼

국민일보

[혜윰노트] 넌 마치 화산처럼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입력 2020-11-20 04:01

본 지면을 통해 탄생을 알렸던 나의 조카가 만 17개월이 됐다. 나는 그 애가 산처럼 크고 푸근한 사람이 되길 바라며 오름이라는 태명을 지어준 바 있다. 오름이는 양가의 첫 아기로 수많은 어른의 사랑을 마시고 덮으며 쑥쑥 자라 이제 작은 새 같은 목소리로 최초의 언어를 빚어내고 있다. 오름이가 말할 줄 아는 또렷한 단어는 엄마, 아빠 정도지만 나는 그 애가 분방하게 내던지는 자모음을 주우며 분명 ‘고모’라고 말했다며 주장하곤 한다. 마음으로 들으면 그렇게 들린다. 우리의 작은 오름은 화산처럼 폭발적인 존재감으로 나라는 인간의 삶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는데 그걸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졌다. 원래도 환경친화적 삶을 살고자 애쓰긴 했지만 주로 다짐뿐이었는데 이제 본격적 액션이 일어났다. 천연 수세미와 장바구니를 쓰고 생수 대신 수돗물을 끓여 마시기 시작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고 주 1회지만 채식도 시작했다. 오름이에게 병든 지구를 물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SF영화에 나오곤 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살풍경을 떠올리고, 그 복판에 서 있는 오름이를 상상한다. 그저 세상에 불려와 생이라는 숙명을 부여받은 이 아이가 어른들의 업을 물려받는 것은 부당하다. 환경 문제에 있어 ‘후손을 생각해서’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는데 진짜배기 후손의 존재는 삼손보다 강했다. 나의 행동을 뒤바꿀 정도로.

둘째, 나는 새로운 목소리를 획득했다. 남동생을 비롯한 우리 가족은 목소리가 낮고 툽툽한 편인데 오름이의 외가 분들은 말씨가 상냥하고 아기를 어르는 목소리가 선녀 같았다. 그런데 오름이가 확실히 더 높고 경쾌한 말투에 화사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 애가 웃어주는 악기가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라면 우리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들은 체질 개선이 시급했다. 나의 부모님은 유튜브로 동화구연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 역시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렸다. 하이톤으로 리드미컬하게 지저귀는 말투가 어느덧 익숙해져 나는 이제 친구네 고양이나 이웃집 개에게도 같은 목소리를 쏟아낸다. 어쩌다 내 새로운 음역대의 우쭈쭈 바이브를 접한 지인들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본 듯 미묘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말이다.

셋째, 다른 아이들에 대한 나의 관심과 이해도가 달라졌다. 평소에도 타자를 포용하며 살고자 노력하긴 하지만 육아라는 필드를 지척에서 엿본 이후 이해의 폭은 더 넓어졌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이 아이가 그저 팔다리를 꼼트락거리던 따끈한 생명체로 태어나 조금씩 육체를 다스려 나가고, 급기야 신체 말단의 섬세한 조작까지 익히는 과정을 보았다. 단지 자극에만 반응하는 귀여운 본능 덩어리에서 소통이 가능한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았다. 한 인간이 얼마나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지,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성장해야 하는지를 지켜본 것이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그 과정을 거쳤다. 나는 이 사회를 이루는 작은 시민들이 이 과정을 잘 통과하길 바란다. 그를 애정 어린 눈으로 느긋이 바라봐줄 여유를 장착했다.

육아란 공감대가 큰 영역이라 다른 아이를 보면서도 우리 집 아이를 투영하는 것이 나뿐은 아닐 것이다. 더 어린 아기를 보면 우리 애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싶고, 더 자란 아이를 보면 우리 애도 저렇게 크겠지 싶다. 연령대가 비슷한 아이들을 보면 마치 공동 양육자라도 된 듯 더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근래 내 마음 바탕을 들쑤시는 일은 16개월 입양아동 학대 사망사건이다. 이렇게 간략히 기술하는 데만도 머릿속에 그 아이의 표정과 멍든 팔다리가 떠올라 몇 번의 심호흡이 필요했다. 잠시 눈물을 쏟고 처벌을 촉구하는 정도로는 이제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 연령의 아이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걷는지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