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보행자가 먼저다

국민일보

[가리사니] 보행자가 먼저다

조성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입력 2020-11-23 04:05

오래전 운전면허증을 취득했고 차량도 보유 중이지만 평일 출퇴근 때는 예외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저녁에 예기치 않은 술자리가 생길 가능성이 커 차라리 차를 집에 두고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다. 또 혼잡하기로 유명한 서울시내는 운전하기가 대단히 까다롭지만, 수도권 대중교통 시설은 너무나 잘 갖춰져 있어 이동에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간간이 나오는 보행자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아무래도 운전자보다는 보행자 편에 더 공감할 때가 많다. 평소 신호등 없는 건널목을 지나거나 인도 없는 이면도로를 걸을 때 불안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뻔히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도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차량을 보는 일도 다반사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신호등이 잘 갖춰진 횡단보도조차 안심하기 힘들다. 보행자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는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우회전 차들 때문이다. 물론 보행자 신호등이 합류 차선의 차량 흐름을 끊은 틈을 타 손쉽게 우회전을 하려는 속내가 같은 운전자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 파란 신호를 받고 합법적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도 마치 채근하듯 머리를 들이미는 차량을 피하려 뜀박질을 할 때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래서 내가 운전을 할 때면 최대한 보행자를 배려해 주려고 노력한다. 어느 날 우회전을 하기 직전에 마주친 건널목에 할머니 한 분이 걸어가시기에 차를 정차하고 건너편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이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온전히 보행자만을 위한 공간인 건널목을 건너는데도 감사 인사를 보낼 정도면 평소에 얼마나 양보를 못 받으셨던 건지.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뒤 같은 장소에서 역시 파란 신호에 건너는 보행자를 기다려줬더니 곧바로 뒤에서 채근하는 경적이 울렸다. 부아가 치밀어올라 모든 보행자가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넌 뒤로도 한참을 기다리다 보행 신호가 적색으로 바뀌고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그 직후, 경적을 울렸던 뒤차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거칠게 추월해가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다못한 나는 악질적인 운전자를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블랙박스를 열어 신고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용차가 어린이보호구역의 보행자 많은 건널목을 비집고 지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경찰청 국민제보 앱을 열어 간단한 전후 상황과 함께 블랙박스 영상을 올렸다. 1주일쯤 뒤 보행자 보호 의무 위반으로 범칙금과 벌점 처분을 내렸다는 통보가 돌아왔다. 원래 보행자 보호 위반은 범칙금 6만원, 벌점 10점인데 어린이보호구역이라 범칙금과 벌점 모두 2배로 물게 된 모양이다. 지인에게 이 얘기를 하자 “똑같은 운전자들끼리 왜 박하게 구느냐”는 타박을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17일 발생한 광주 횡단보도 사고는 운전자들의 보행자 보호 인식이 얼마나 저조한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물론 사고의 일차적 책임은 보행자를 친 트럭 운전사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맞은편을 지나던 차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 인근에서는 일단 서행해야 하며 보행자가 있으면 정차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시 맞은편 차로 운전자들 중 단 한 명만이라도 이 원칙을 지켜 보행자들을 안전하게 지나가게 했다면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무개념 보행자’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중앙보호대 있는 고속 자동차 전용도로를 가로지르는 사람, 가로등 없는 컴컴한 밤중에 오가는 차량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막무가내로 뛰어드는 사람 등의 블랙박스 영상을 공유하며 맹비난을 퍼붓는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차량 대 보행자 사고에서 보행자에게 100% 책임을 물리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보행자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는 운전자들의 행태도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조성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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