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우 칼럼] 3류 국가가 되고 있다

국민일보

[배병우 칼럼] 3류 국가가 되고 있다

입력 2020-11-25 04:05

가덕도 공항 밀어붙이기는
적법성 합리성 등 행정의 기본
원칙 깡그리 부정하는 것

“동네 계를 해도 이렇게
엉터리로는 안 한다”

관료들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만 봐… 법치와 책임성 실종돼
이미 민주정은 허울뿐

세계적 공항 설계 회사인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이 2016년 6월 내놓은 ‘영남권 신공항 사전타당성 검토 연구 보고서’는 방대하다. 3권 797쪽에 이른다. 하지만 입지 선정을 다룬 2권만 훑어봐도 그 수준과 골자를 알 수 있다. 평가 항목은 운영상 고려사항, 접근성, 사회경제적 영향, 생태계, 비용, 리스크 및 실현 가능성 등 7개. 이들 항목별로 공항 후보지를 철저히 계량화해 평가했다. 당시 보고서를 본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이 그 전문성과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가덕도공항 유치에 시장 직을 걸었던 서병수 전 부산시장이 보고서가 나온 뒤 승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된다.

알다시피 결론은 김해공항이 압도적 1위, 가덕도는 밀양에도 크게 뒤지는 꼴찌다. 가덕도공항 건립에 드는 총투자비는 92억9500만 달러(약 10조2800억원)로 37억8800만 달러(약 4조1900억원)가 드는 김해공항의 2.53배다. 수심이 15~35m나 되는 깊은 바다를 메워야 공항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해 접근성도 최악이다. 그래서 운영비가 김해공항보다 2.56배 더 든다. 태풍 해일 같은 자연재해 등이 미칠 영향을 분석한 ‘비항공적 위험’ 항목에서도 가덕도는 30점 만점에 9.8점으로 김해(15.8점), 밀양(18.33점)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가 지난 17일 내놓은 검증 결과 발표문은 수준 이하다. 각론에서는 ‘ADPi 등의 추계가 합당하다’,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고 하다가 갑자기 ‘(김해신공항은) 근본적 검토가 불가피하다’고 결론 내린다. 논리적 비약, 문구 간 의미 상충이 거듭돼 암호문 같다. 검증위가 김해신공항을 사실상 백지화하는 결론을 내렸다면 ADPi 보고서는 엉터리라는 의미다. ADPi 연구용역에는 국고 20억원이 들었다. 당연히 검증위 결과 발표 현장에는 ADPi 측의 해명이든 반박이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향후에라도 엉터리 분석으로 거액의 국고를 축낸 ADPi에 책임을 묻겠다는 얘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 검증위 결과 발표를 신뢰할 수 없는 첫째 이유다.

검증위 내부의 기본적 입장은 ‘김해신공항 유지’였다는 위원들의 증언이 17일 발표 이후 잇따라 나왔다. 논란이 커지는데도 여당은 ‘김해신공항 백지화=가덕도공항 확정’으로 몰아가려 한다. 가덕도특별법을 제정해 아예 대못을 박을 태세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떴다. “가덕도뿐 아니라 대구·광주도 신공항특별법을 만들자”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반발하자 아예 수십조원을 더 투입해 입을 막겠다는 전략이다. 국민 세금이 자기들 쌈짓돈이다.

이미 4년 전 5개 광역자치단체장들이 ADPi 보고서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영남권 신공항 논란은 사실상 종결됐었다. 정권이 바뀌자 불씨가 다시 살아나더니 최악의 선택지인 가덕도로 가고 있다. 한마디로 코미디다. 결정도 절차도 모두 엉터리다. 그래서 ‘과거 시골에서 계를 해도 이렇게는 안 했다’, ‘조폭 두목도 이런 식으로 일처리하지 않는다’는 댓글이 오르는 것일 게다. 행정권을 비롯해 모든 국가권력 행사에는 합리성, 효율성, 적법성, 투명성 등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여당의 가덕도공항 밀어붙이기는 이런 기본 원칙을 깡그리 부정했다. 검증위 내부의 잡음과 반발은 절차적 투명성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며, 여당이 김해신공항 검증 결과를 가덕도공항 확정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적법성에 대한 부정이다. 10조원 이상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가덕도공항 건설을 예비타당성조사도 없이 하겠다는 것은 합리성과 효율성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미 이 정부에서 민주정의 두 기둥인 책임성과 법의 지배가 무너졌다. 집값 잡기는 고사하고 전세난이 통제불능 상태가 됐는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법과 규정을 파괴하는 언행을 연일 계속해 무법부(無法部) 장관 명칭이 어울리는 법무부 장관도 건재하다.

공직자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만 바라보고, 국가권력이 법과 원칙을 마구잡이로 파괴해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이번 정부 들어 한국 정치제도와 행정의 급격한 퇴보는 통탄할 정도다. 미국처럼 ‘선거 불복’은 아직 안 하지 않느냐는 걸 위안 삼아야 할 것인가.

논설위원 bwba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