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인간은 실패에서 배운다

국민일보

[혜윰노트] 인간은 실패에서 배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작가)

입력 2020-11-27 04:07

우리는 늘 실패에서 배운다. 인간은 완벽한 체제를 완성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시작해 왔다. 그 역사는 온전히 인류가 써낸 텍스트에 모두 담겨 있다. 우리는 수많은 정반합의 역사를 거쳐 수정된 자본주의 체계에서 살고 있다. 복잡다단했던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실패를 기록한 작품이 있다. 존 스타인벡에게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동시에 안긴 작품, ‘분노의 포도’다.

1939년 발표된 소설은 대공황에 빠진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은 자신만만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일을 패망시킨 뒤 자본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맹신해 자유방임 체제를 유지했고, 세계적으로 몰아닥치던 공산주의 열풍의 반감 또한 있었다. 하지만 금융 시장이 붕괴되고 경기가 악화되자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생산과 공급의 균형이 무너지며 대공황이 발생한다. 소설은 당시의 인간상을 비춘다.

주인공 톰 조드의 가족은 오클라호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들은 인디언의 땅을 빼앗아 대대손손 살아 왔으나, 흉작이 들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마을의 모든 땅을 은행에 차압당한다. 도저히 고향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온 가족은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전 재산을 트럭 하나에 싣고 일자리가 넘친다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이후 소설은 로드무비 형식을 띤다. 그들의 일대기는 현대 좀비 영화를 방불케 한다. 고향을 떠나 살 수 없는 아버지는 출발하자마자 트럭 위에서 죽어버린다. 길에서는 각종 사기와 속임수가 난무하고 있다. 전 재산을 탕진해갈수록 가족은 헛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려 애쓸 뿐이지만 캘리포니아는 이미 지옥에 가깝다. 임금은 철저히 담합돼 그들은 잠깐씩 사용되고 버려지는 도구일 뿐이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산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궁핍함과 가난이 그들에게 찾아온다. 형편없는 저임금과 고용자 폭리에 사람들은 굶주려 죽어간다. 게다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많은 물자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폐기된다. 커피는 태워져 연료로 쓰이고 옥수수는 난방에 사용되며 가축도 산 채 땅에 묻힌다. 심지어 자본가들은 사람을 고용해 썩어가는 물자를 지켜 가격이 폭락하는 걸 막는다. 당시 자본주의 체계는 이를 제어하지 못했다. 인간은 가축보다 못한 존재였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시도는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했다. 톰 조드 가족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분노의 포도’는 그야말로 인간들의 영혼의 분노가 익어간다는 은유다.

지금의 시선으로 소설은 한계 또한 드러낸다. 이주자들의 자치구를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공동체를 해치려는 손길을 일방적인 악으로 묘사하는 대목은 어딘가 어색하다. 지나치게 휴머니즘을 강조한 엔딩에서는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혁명적 낭만주의는 지난 시대의 낡은 유물이 됐으며, 이미 사회주의 실험이 명백히 실패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1930년대 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당시 이 소설을 출간하지 못하게 하려던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결국 이 책은 모두에게 읽혔고,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실패를 인정하고 뉴딜 정책을 기반으로 한 수정자본주의로 돌아선다.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인 경제 체계다. 그 과도기의 끔찍함을 비추며 체제의 실패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분노의 포도’다.

불후의 고전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정반합의 역사에서 성장과 분배의 토론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며, 인류 역사상 극단적 실험은 모조리 실패했다. 그 결과에는 항상 인간들의 잔혹한 희생이 따랐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간들에게 잔혹함이란 없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지나간 실패에서 돌이켜보아야 한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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