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위리안치

국민일보

[청사초롱] 위리안치

장유승 (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

입력 2020-12-16 04:05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유배 죄인의 거처에 높은 울타리를 치고 출입을 금지하는 형벌이다. 사형에 한 단계 못 미치는 중형에 해당한다. 엄밀히 따지면 법정 형벌은 아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도, 형사 사건에 준용한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도 보이지 않는다. ‘연산군일기’에 처음 등장하니 잔인하고 제멋대로였던 연산군의 창안이 아닌가 싶다. 그 역시 왕위에서 쫓겨난 뒤 위리안치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니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문제는 연산군이 죽은 뒤에도 이 가혹한 형벌이 폐지되지 않고 정적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계속 쓰였다는 점이다.

법정 형벌이 아닌 탓인지 위리안치의 정확한 규정은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기준(奇遵·1492~1521)과 정온(鄭蘊·1569~1641)이 자세한 기록을 남겨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기준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1520년 함경도 온성에 위리안치됐다. 지방관이 고을 사람들을 총동원해 높고 두터운 울타리를 만들었다. 작은 집 주위에 큰 기둥을 세우고 잡목으로 주위를 둘러쌌다. 완성된 울타리의 둘레는 50자, 높이는 네댓 길, 다시 말해 두 평 남짓한 집을 십여 미터 높이의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셈이다.

울타리가 워낙 높아 안에는 햇빛이 들지 않는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물 속에 있는 것 같다. 출입문은 없다. 음식을 넣어주는 작은 구멍뿐이다.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쯤 되면 집이 아니라 무덤이다. 사람들은 ‘산무덤(生塚)’이라 불렀다. 기준은 이곳에서 1년 넘게 버티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정온은 1614년 영창대군의 신원을 건의했다가 광해군의 심기를 거슬려 제주에 위리안치됐다.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는 햇빛조차 통하지 않았으며, 지붕보다 한 길이나 높았다. 그 역시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우물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더구나 정온의 유배지는 무덥고 습한 제주였다. 여름이면 벽에 물방울이 맺히고 바닥은 진흙처럼 끈적였다. 쇠로 만든 경첩조차 몇 년 못 가 부스러졌다. 그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의 몸이 멀쩡할 리 없다.

그래도 정온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집은 좁기는 했지만 침실과 서재, 부엌과 변소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노비가 묵을 방도 있었다니 노비와 함께 살았던 듯하다. 손님과 함께 앉으려고 평상을 설치했다니 외부인과의 접촉도 가능했던 모양이다. 책도 수백 권이나 쌓아두었다. 그 덕택인지 정온은 10년 가까운 위리안치를 버텨내고 살아남았다.

조선시대 유배객 처지는 천차만별이었다. 조정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으면 감시하는 관원들이 오히려 굽신거렸다. 죄수가 아니라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뒷배 없는 유배객은 먹고사는 것부터가 큰일이었다. 국가가 의식주를 책임지는 지금의 감옥과는 다르다. 옥바라지하는 가족이 없으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관원에 따라서는 유배객이 따뜻한 옷을 입거나 배불리 밥을 먹는 것도 문제삼았다. 편지를 쓰거나 책 읽는 것까지 금지했다.

추사 김정희 역시 위리안치를 경험한 인물이다. 명목은 위리안치였지만, 그의 유배생활을 증언하는 수많은 자료로 보건대 엄격한 위리안치는 아니었던 듯하다.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웠고 가족과 친구가 보내는 편지와 물건도 전해받았다. 혹독한 고난 속에 죽어간 유배객들에 비하면 추사는 혜택받은 존재였다.

최근 국가의 품에 안긴 추사의 1844년작 ‘세한도’는 위리안치의 산물이다. 겨울을 꿋꿋이 이겨낸 세한도 속 소나무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한 국민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리라. 하지만 세한도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추사와 달리 종잇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위리안치 속에서 스러진 이들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힘들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천천히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처럼.

장유승 (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