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법원이 두려워 항명 타령인가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법원이 두려워 항명 타령인가

입력 2020-12-22 04:01

정연주 KBS 사장의 대통령 상대 소송 때와 달리
윤석열 소송은 항명이라며 자진사퇴 압박… 내로남불 행태의 전형
징계위는 억지투성이 징계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대통령은 재가에 재량권 없다고 숨어
사법부가 징계 사태로 무너진 법치 바로 세워야… 오늘 법원 심리에서 엄정한 판단 내리길

이명박 정권 때인 2008년 8월 정연주 KBS 사장은 해임되자마자 곧바로 해임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상대방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 KBS 이사회가 의결한 해임 제청안을 받아들여 해임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제청안에 서명하면서 “KBS도 이제 거듭나야 한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해임 당일 야당인 민주당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당대표는 “언론자유를 말살하는 집권 여당에 맞서 원내외 투쟁을 진행할 것”이라며 분노했다. 당에서는 대통령 탄핵 추진 검토까지 거론됐다.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선언한 것이다.

12년이 흐른 지금 당시 야당이 집권 여당이 돼 권력의 단맛을 보자 적폐라 했던 과거 정권의 칼춤을 따라 한다. 말 안 듣는 윤석열 검찰총장 몰아내기의 수순이 묘하게 일치한다. 강도만 정직 2개월로 조금 낮췄을 뿐 중징계 카드를 꺼내든 건 마찬가지다. 대통령 말씀도 데자뷔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징계 제청안을 재가하면서 한 말은 12년 전 “이제 거듭나야 한다”와 닮은꼴인 “검찰이 바로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였다.

징계 이후 대응 태도만 180도 달라졌다. 바로 소송에 대한 극과 극의 반응이다. 정연주 소송 때는 대통령 상대 법적투쟁을 뒷받침하겠다고 해놓고 이번에 윤석열이 행정소송을 내자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라고 몰아붙인다. “대통령과의 싸움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대통령과 끝까지 가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는 객기” “대통령에게 항명하는 현직 검찰총장의 작태” 운운하며 자진사퇴를 압박한다. 총리까지 나서서 “결단을 하는 게 좋지 않겠나”라며 옆구리를 꾹 찌른다. 여론조사에서 국민 절반 이상(54.8%)이 윤석열의 사퇴는 불필요하다(21일 리얼미터)고 했지만 확증편향의 여권이 여론을 듣기나 하겠나.

윤석열의 소송 상대는 형식적으론 법무부 장관이다. 그럼에도 처분 조치를 최종 집행한 게 대통령이니까 항명으로 규정한 거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절대 왕정의 군주도 아닌데 웬 항명 타령인가. 그런 관점이라면 대통령을 직접 피고로 맞상대한 정연주 시절에도 항명은 안 된다며 소송을 뜯어말렸어야 했다. 그때는 정상적 절차이고 지금은 비정상이라는 게 우습다. 이런 식으로 잣대가 달라지니까 내로남불 행태라고 하는 거다.

여권은 법원이 두려운가 보다. 윤석열 비위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라 국가공무원법상 퇴직이 불가능한데도 자진사퇴를 채근한다. 오히려 비위를 추가 확인하고 정직보다 중한 해임으로 쫓아내면 될 일인데 법원의 시간이 오기 전에 사건 자체를 없애려는 듯 초법적 요구를 한다. 징계 결정에 무리수가 많아서일 테다. 청와대가 대통령의 재가에 재량권이 없다며 법무부 징계위원회 뒤에 숨어버린 것도 ‘대통령이 재량권을 남용했다’는 정연주 소송 판례를 의식했기 때문 아닐까. 아니면 법원에 가이드라인을 준 건가. 어쨌든 대통령이 로봇임을 자처하는 세상이 됐다. 이건 무능인가 무책임인가.

징계위도 직무배제 효력을 정지시킨 법원의 위력을 절감한 듯 정치적 징계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느라 애썼다. 해임이 가능하지만 검찰총장 징계라는 특수한 사정, 어떤 경우에도 보장돼야 하는 검찰총장 임기제, 잔여 임기 고려 등이 담긴 징계의결서 요지를 봐도 그렇다. 애초부터 소송을 예상해 법원에 ‘무결점’을 호소하기 위해 화려한 술법을 동원한 흔적이 역력하다. 실상은 실체 없는 추측과 가정 등으로 도배돼 있는데 말이다. 특히 억지투성이의 징계 사유, 편파적 징계위 구성, 불공정 징계 절차라는 주장에 공감이 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혐의 사실 확인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아서다. 그래놓고 봐주듯 정직을 택했단다. 법원의 철퇴를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이번 사태로 무너진 건 법치주의다. 법치 수호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법치를 바로 세워놓아야 한다. 오늘 징계처분 효력 집행정지 신청 사건 심리가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다. 가처분 사건은 본안 소송과 달리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공공복리에 대한 중대한 영향’ 등이 주요 쟁점이라고 하나 검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검찰총장 임기제라는 본질적 문제를 짚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법리와 증거에 입각해 사법부가 엄정한 판단을 내려주기 바란다. 훗날 역사가 사법부는 살아 있었다는 기록을 쓸 수 있도록.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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