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새해엔 균형적 판단을 해봅시다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새해엔 균형적 판단을 해봅시다

입력 2020-12-29 04:01

대통령 사과 이끌어낸 법원 결정은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
검찰 개혁 제대로 성과 있는지 평가해야…
선동만 있고 책임 결여된 정치로 오히려 개혁을 망친 것 아닌가
현재·과거보다 더 나은 정부 갖기 위해
시민 개개인이 균형 있게 판단하는 분별력 가져야

지난주 윤석열 검찰총장 정직 2개월 징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 인용 결정은 더할나위없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재판장 홍순욱)는 사법을 정치로 끌어들여 아무말대잔치를 해대는 정치적 공격을 누구 말대로 ‘따박따박’ 정리했다.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법무부 징계위는 무효, 윤석열의 정치적 중립성을 문제삼은 징계 사유는 추측에 불과, 회복할 수 없는 긴급한 손해 인정 등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윤석열 쪽의 완승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결이 다른 결정도 있다. 이른바 판사 사찰 문건은 악용 소지가 있어 매우 부적절했고, 채널A 감찰 방해 혐의는 본안 재판에서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검찰의 행태에 문제점이 있다는 판단을 했고, 추미애 법무장관 쪽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인 것이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재판부는 특히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에 대한 증명 책임은 피신청인에게 있고, 이에 대한 우려가 소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징계하지 않으면 마치 공공복리에 중대한 위협이 있다는 호들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대통령과 법무장관은 검찰총장에게 법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졌다.

평소 스타일답지 않게 문재인 대통령은 빠르게 사과했다. 물론 검찰의 성찰도 지시했다. 대통령은 징계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을 매우 강조했었다. 그런데 재판부 결정은 그 절차적 정당성에 흠결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논리와 합리성을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무시하고 갈 순 없었을 게다. 그동안 도 넘은 여권 사람들의 공격을 감안할 때, 아무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법무장관을 강력히 지원한 정황을 볼 때 대통령으로서 민망한 사과였다.

자, 이젠 연말도 됐으니 가결산을 해봐야 한다. 지난해 가을 조국 사태 이후 국정 최고 목표는 누가 봐도 검찰 개혁이었다. 1년 넘게 지났는데 검찰 개혁이 성공했는가. 성공의 길로 접어들었는가. 아닌 것 같다. 현실성도(사실은 별 의지도) 없는 탄핵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여권 입장에선 확실히 꼬였다. 탄핵 주장은 강성 지지층을 향한 일부 정치인들의 노이즈 마케팅 식 자기 정치일 뿐이다. 차라리 1년 전부터 기소 편의와 영장청구 독점에 대한 폐해를 주장하고 기소와 수사의 분리를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따박따박 주장했으면 여론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 등과 강성 문파는 검찰총장을 탄핵하지 않거나, 검찰 개혁을 하지 않으면 대통령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대통령 수사를 피하기 위해 탄핵하고 개혁하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만든다는 뜻인가. 퇴임 후 안전이 위험할 만큼 대통령이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인가. 이러니 보통사람들은 ‘검찰 개혁=검찰 장악=퇴임 후 대통령 안전 보장’이란 생각을 한다. 꼭 해야만 하는 검찰 개혁이었고, 견제 수단으로 필요한 게 공수처였고, 그래서 여론의 지지도 높았었다. 하지만 강성으로 지르는 게 정의인 양 떠든 이들 때문에 검찰 개혁이 한낱 정권 재연장이나 자기 편 흠결을 덮기 위한 조치로 추락했다. 낡은, 과거의 신념윤리만 강했지 책임윤리는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책임성 확보가 결여된 국정 운영의 모습이다.

최장집, 홍세화, 강준만 등 진보 진영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오죽하면 ‘민주 건달’ ‘싸가지 없는 진보’ ‘운동권 전체주의’란 표현을 했겠는가. 이들의 지적은 진보 진영에서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토록 지지해줬던 중도 진보나 중도 보수층이 떠나가고 있음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느 세밑치고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코로나는 우리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방종에서 성찰로, 일탈에서 정상으로 가는 방법을 차분하게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우리는 지금이나 과거보다 더 좋은 정부, 더 좋은 정치를 가질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시민 개개인은 정치 현안을 내로남불이 아니라 사안별로 구별해 판단하는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 막스 베버가 제시한 정치가의 세 덕목 중 하나인 ‘균형적 판단’은 지금 대한민국에선 개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건 구슬 서 말을 꿰서 보배로 만들 수 있는 정치 지도자와 정치를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 아닐까. 새해엔 각자가 그런 선구안을 가져보자.

김명호 편집인 mhkim@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