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낮은 곳에 말씀의 빛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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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낮은 곳에 말씀의 빛을 비추다

독신전도단 강순명 목사와 서울 백범로

입력 2021-01-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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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원동 용산제일교회. 2018년 11월 어느 주일 아침 모습이다. 한국의 영성운동과 빈민구제에 힘쓴 강순명 목사가 천막을 치고 시작했던 옛 도원동교회(아래 흑백 사진) 터이기도 하다. 강순명은 해방~6·25전쟁 기간 용산역 뒤편 지금의 백범로를 중심으로 영혼 구원에 힘썼다.

1910년대 발행된 ‘경성시가지도’를 유심히 보노라면 당대 우리 민족은 메시아가 임재하지 않는 한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때 일제의 무력 중심은 용산이었다. ‘용산정차장’ 앞으로 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용산헌병대, 대일본제국 군사령부(현 미군용산기지) 등을 구축, 병참 기지화했다.

그 용산 철로 서편. 지금의 문배동 신계동 도원동 원효로 청파동 일대 조선의 것이라고는 ‘효창원’뿐이다. 서편 용산은 군수물자 생산기지였다. 1942년에는 태평양전쟁 연합군 포로를 제사공장 자리(현 신광여고)에 수용하기도 했다.

전도사관학교였던 연경원을 찾은 백범 김구(앞줄 중앙)와 아들을 안고 있는 강순명(백범 오른쪽).

1945년 8월 15일. 해방됐으나 이 일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를 미 군정이 접수했기 때문이다. 그 서편 용산, 지금의 백범로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1946년 환국한 김구 선생이 연경원·연경장로교회(현 신계동 남정초교 자리 추정)에서 학생 및 교인과 찍은 사진이다. 연경원은 ‘청빈과 헌신의 독신전도단 운동가’로 불리는 강순명 목사가 세운 전도사관학교였다. 학교 규칙이 엄격했다.

그는 이세종 최흥종 강순명 이현필 이준묵 등으로 이어지는 호남영맥 영성가이다. 또 빈민구제와 교육을 통해 기독교 사회복지와 교육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지금도 광주에 그가 설립한 천혜경로원이 운영되고 있다. 강순명은 최흥종 목사의 큰딸과 결혼하고 평신도전도인으로 평생 헌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광주선교부 고든 에비슨(1891~1967)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진학, 목회자가 됐다.

광주광역시 천혜경로원 1950년대(추정) 모습. 백범과 사진을 찍었던 그 아들이 현 원장이다.

강순명은 모태 신앙이었으나 ‘박치기 명수’로 불리는 불량청소년이었다.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최흥종의 신앙적 지도에 거듭났고, 1923년 도쿄 세이소쿠중학 늦깎이 유학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때 우에노공원으로 극적으로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다.

“하나님, 제게 사흘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의 죄를 청산하고 죽겠습니다. 주 예수님 사흘만….”

이렇게 피신 사흘이 지났다.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나의 일생은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귀국한 그는 에비슨의 농촌계몽 활동을 도우며 배은희(1888~1966·정치인) 목사와 함께 전주 서문교회에서 ‘독신전도단’을 조직한다. 독신전도단은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 독신(獨身)으로 파송돼 3년 동안 헌신하는 자비량 선교를 말한다. 기혼자일 경우 반드시 홀로 부임해야 했다. 독신전도단의 궁극 목표는 궁핍한 조국 현실을 이겨내려는 기독교 농촌운동 즉 이상촌운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독창적이고 전위적 전도단은 조선기독교장로회 교권과 충돌했다. 장로회 전북노회와 총회가 각기 이단·불법단체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기독교 신앙공동체 유지를 위해 성생활을 포함한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농촌에 들어가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전도자로 설교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도 전북 익산과 전남 광산(광주 광산구)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따랐다. 강순명이 일본 유학 시절 빈민의 전도자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의 저서 ‘가난한 자의 눈물’ 등을 읽고 기독교사회운동에 눈뜬 것도 독신전도단 설립 배경이다.

독신전도단은 거지에 단벌 옷을 내줬고, 고아를 업어왔고, 병자를 끌어안고 기도했으며 나환자·폐병 환자에 손을 내밀어 집단 마을을 만들었다. ‘강순명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텅 빈 교회당에 들어가 밤을 새웠고 눈물의 열도(熱禱)로 제단을 적시었다.’(윤남하, ‘믿음으로 살다 간 강순명 소전’ 중)

193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며 훼절했고 독신전도단도 탄압받았다. 해방 전 모든 교회가 일본기독교회에 흡수되거나 문을 닫았고 선교사들은 쫓겨났다. 강순명도 1940~45년 바울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끝내 강원도 삼척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되자마자 강순명은 영적 고갈 상태에 빠진 민중의 구령을 급선무로 봤다. 그는 서울 북아현동에 독신전도단 후신 격인 연경원(硏經院)을 설립, 주로 월남한 기독학생들을 모아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신학교였다. 윤필성 윤치병 이남철 차남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해 가르쳤다. 그는 학생수가 늘자 원정보통학교(현 남정초교) 옆 적산건물로 이전했다.


지난 주말. 삼각지로터리에서 철길 너머 백범로 방향 좌측 예장합동 원동교회. 교회 문은 ‘코로나19 집합금지’로 굳게 닫혔다. 원동교회 뒤가 남정초교이고 이 학교 축대 위는 천주교 당고개순교성지(신계역사공원)이다. 월남 기독교인들이 해방된 자유의 땅에서 성경을 배우며 새백성(新民)을 꿈꾸던 일대다. 그러나 강신명은 장로회로부터 ‘사사로이 안수하여 교계 질서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제명당한다. 강순명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가 그리스도의교회 교파로 이적한 이유다.

용산역 철로. 넝마주이 등에게 복음을 전하던 교회가 철거되고 있다. 철로 오른쪽이 강순명 활동 터.

“예수를 믿으려면 강순명처럼 믿어라.” 불신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강순명이 ‘하나님 나라’ 이상향을 위해 교회, 신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을 일구었던(1945~49) 옛 연경원과 연경교회는 현재 후신 격인 원동교회로 남았다. 그는 제명당한 후 도원동 그리스도의교회(현 용산제일교회와 도원동교회 터) 등을 개척했고 고향 광주에 경로원 등을 설립했다.

강신명은 1955년 무렵 서울 신촌 언덕에 토굴을 파고 ‘연경신도원’이란 이름으로 기도 생활하다 별세했다. 감신대 이덕주 명예교수(교회사)는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했던 지도자였으며 제도와 교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독신’ 전도자였다”고 평했다.

강순명 (1898~1959) 연보

·1918년 최흥종 목사 딸 최숙이와 결혼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성령 체험
·1925년 에비슨 선교사와 농촌운동
·1928년 독신전도단 조직
·1939년대 평양신학교 졸업
·1940~45년 금암, 용강교회 목회
·1946년 초교파 연경원·연경교회 출범
·1948~52년 그리스도의교회 소속 목회
·1952~59년 천혜경로원 설립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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