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자라나는 행운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자라나는 행운

이원하 시인

입력 2021-01-13 04:05

책임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던 시절에 ‘마리모’라는 식물을 분양받았다. 마리모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식물로 유명했다. 키우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끼처럼 생긴 작은 동그라미의 마리모를 물과 함께 유리병에 넣어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깨끗한 물로 갈아주기만 하면 됐다. 마리모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그럴 때는 소금을 소량 넣어주면 다시 초록빛을 띠며 건강해졌다. 늘 바닥에 가라앉은 채 생활하는 마리모가 물 위로 뜨는 순간이 있는데 이건 마리모의 기분이 좋다는 신호였다. 흔치 않은 이 상황을 포착하게 되면 행운이 온다고 전해졌다. 이 매력적인 식물을 사랑했다. 학교에 갈 때면 서랍 안에 깊숙이 숨겨두고 갔다. 그게 마리모를 지켜주는 행위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루는 깜빡하고 마리모를 책상 위에 꺼내두고 등교했다. 그리고 그날 마리모는 죽어버렸다.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와주던 이모가 가족이 마시다 남긴 물이라고 생각해 하수구에 부어버린 거였다. 마리모가 워낙 작아 눈에 안 띄니 그럴 만했다. 내 탓이었다. 까만 하수구 구멍을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다. 지켜주지 못한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중학생이던 그때 그 어린 마음에 책임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다. 그날의 아픔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생명을 집안으로 들이지 못한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해 키우고 싶지만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분양받지 않을 것이다.

눈사람조차도 쉽게 만들지 못한다. 폭설이 쏟아진 올해 겨울도 눈사람을 만들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지내게 될 눈사람의 짧은 생을 내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책임질 수 없다면 차라리 나처럼 미련해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들인 식물도, 동물도, 어린아이도 내가 뒤돌아서면 혼자서 살아남기 힘든 존재들이다. 단순한 욕심 때문에, 과시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작고 연약한 생명에게 슬픔을 주면 안 된다.

이원하 시인

포토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