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금성탕 금순씨

국민일보

[빛과 소금] 금성탕 금순씨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입력 2021-01-16 04:03

강원도 원주 토박이라면 ‘금성탕’을 기억한다. 1950~70년대 원주에서 군복무를 하거나 출장지로 삼았던 사람도 평원동의 ‘금성탕·금성호텔’과 한 번은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금성탕 건물은 근대문화유산급이 돼 지방자치단체가 보존 가치 여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 금성탕의 주인은 ‘삼팔따라지’ 금순씨였다. 함경도 청진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 김금순(1931~2016)씨는 사고무친으로 남한 땅에서 ‘삼천교회 권사’라는 비석으로 남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나’ 가사에 딱 들어맞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0년 12월 25일 흥남부두에서 후퇴하는 유엔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기적’ 덕분에 목숨을 건진 금순씨였다. 금순씨는 생전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가 없었으면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식들은 처음에 교회 직분도 있고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신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바람을 담으려는 것이려니 했다.

금순씨 인생 말년. 남북 화해 분위기가 돌면서 금순씨는 더 열성적으로 중국과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목욕탕 운영을 통해 억척스럽게 모은 큰돈을 헌금해 옌볜조선족자치주 3곳에 예배당을 세웠다. 김일성대학을 나온 청진의 큰오빠 등 9남매의 북한 가족과 여러 경로를 통해 서신이 오갔으나 그들의 안녕을 위해 쉽게 만날 수도 없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도 너무나 감사하다.’ 북한 고위직이었던 오빠의 이 편지 내용에 깊이 공감하고 한없이 울었다.

금순씨는 광복 후 고등교육을 받은 여학생으로서 새 조국 건설이라는 슬로건에 따라 농촌 각지를 돌며 계몽운동에 힘썼다. 연극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이었다. 마치 ‘상록수’의 최영신과 같은 애국심이 금순씨에게 있었다. 그때 김일성대에 다니던 오빠가 같은 학교 친구를 금순씨에게 소개했고 이내 둘은 사랑에 빠졌다. 금순씨의 첫사랑은 청진의 개화 교인 자제였고 신심이 깊었다. 금순씨는 그에게서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교회에 가본 적도 없었던 금순씨는 그 십자가 목걸이를 늘 걸고 다녔다. 그들은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전쟁과 함께 격랑에 휩싸였다.

“나를 짝사랑했던 마을 청년이 북진한 국군에게 내가 공산당원이라고 밀고를 했더구나. 그날로 붙잡혀 청진 탄광 어디로 끌려갔다. 40~50명이 사살당했어. 나도 허벅지에 총을 맞아 혼절했고… 어떻게 목숨이 붙어 시신 속에서 기어 나오는데 장검 장착한 군인이 내 목을 찔렀어. 한데 나무 십자가가 지켜준 거야. 그 군인이 움칫하더니 내 목덜미를 잡고 끌어냈어. 그 그리스도인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죽은 목숨 아니었겠니.” 금순씨는 막내아들에게 이런 고백을 했었다. “아들아,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 그를 믿고 이웃을 도우며 선하게 살 거라. 축복은 주님만이 주신다.”

1920년대 ‘외교원과 전도부인’이라는 소설이 있다. 요즘 말로 ‘보험중개사와 여전도사’이다.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전도부인이 외교원을 전도하려 하자 외교원은 생명보험 가입을 조건으로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 전도 실적을 채우려던 전도부인은 생명록과 보험증권을 등가 교환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몇몇 교회와 선교단체의 일탈적 현장예배 행위가 지탄을 받고 있다. 그들은 현장에서의 축복권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는 교인을 흔든다. 한데 피조물이 서로에게 축복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왜 ‘전도부인’인 양 우리 삶을 주관하고 생명록을 팔려 하는가. 목사가 장로를, 권사가 집사를, 집사가 평신도를 향해 “축복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행위다. 모든 생사화복은 주님이 쥐고 있다. “축복은 주님만이 주시니 선하게 살라”는 금순씨 말이 오히려 영적으로 들리는 요즘이다.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