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세컨더리 보이콧

국민일보

[한마당] 세컨더리 보이콧

라동철 논설위원

입력 2021-01-13 04:05

제재 대상 국가의 기업과 거래하는 다른 국가의 기업이나 개인에 대해서도 제재하는 것을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이라고 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합의된 게 아니라 미국이 독자적으로 행하는 제재인데도 위력은 막강하다. 미국이 국제 교역에 필수인 달러 결제망을 장악한 패권국이기 때문이다. 대상이 된 기업은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 금융기관들과의 거래가 막히는 데다 제3국 기업들과의 거래가 사실상 차단돼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2005년 북한의 자금 세탁에 이용됐다는 이유로 제재 대상이 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제재에 착수하자 BDA는 대량 인출 사태가 발생했고 중국 은행들조차도 거래를 끊어 파산 위기로 내몰렸다.

지난 4일 걸프 해역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한국 국적 화학운반선이 나포된 사건도 세컨더리 보이콧과 연관돼 있다. 이란은 우리은행과 기업은행 등 2곳에 동결된 자국 자금 70억 달러(7조6000억원)를 받아내려고 우리 선박을 인질로 잡았다. 이 돈은 우리나라에 석유를 수출하고 받을 대금인데 미국이 2019년 이란을 제재하면서 세컨더리 보이콧을 적용해 인출할 수 없게 됐다.

서울 강남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테헤란로가 상징하듯 한국과 이란은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2010년대 초 한국은 이란의 4대 교역국, 이란은 한국의 중동 3대 수출국이었다. 2007년 현지에서 방영된 ‘대장금’ ‘주몽’ 등 한국 드라마는 시청률이 80~90%를 기록할 정도였다. 이런 두 나라가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인해 얼굴을 붉히는 처지가 됐다.

애꿎은 민간 선박을 납치한 이란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석유 대금을 주지 못하는 한국의 입장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기축통화인 달러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를 쥐락펴락해 온 미국의 횡포인데도 거부할 힘이 없는 우리 처지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동맹과 우방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이 상황을 돌파할 창의적 해법은 정녕 없는 걸까.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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