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개헌 트라우마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개헌 트라우마

입력 2021-01-13 04:02
다수 국민 개헌에 긍정적
30년 흐른 시대 변화에 걸맞은
기본권 확대 필요성 커져

그럼에도 소리만 요란할 뿐
정치권 합의 기대 어려워

개헌을 특정세력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그릇된 인식 버려야


개헌은 정치권의 오래된 논제다. 정치 개혁이 화두로 떠오를 때마다,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 담론을 얘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다. 국민들도 개헌에 긍정적이다. 새해를 맞아 발표된 관련 여론조사에서 개헌 찬성 의견이 57.9%로 28.7%의 반대 의견을 압도했다. 바람직한 권력구조로는 대통령 중임제가 가장 많았고 대통령 중심제 선호도가 의원내각제보다 훨씬 높았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개헌을 얘기했다. 권력분산형 개헌을 통해 사회 갈등 요소를 줄이자는 논지다. 박 의장은 지난해 제헌절 경축식에서도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개정한 지 한 세대가 지난 현행 헌법으로는 오늘의 시대정신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며 2021년을 개헌의 적기로 제시했었다.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도 “변화된 시대 흐름에 맞게 경제 사회 문화 노동 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헌법 정신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시작할 때”라고 힘을 보탰다.

그러나 단시간 내에 개헌이 이뤄질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절반 이상의 국민이 필요성을 인정해도, 국회의장과 국무총리가 목청을 높여도 ‘그냥 한번 해보는 얘기’로 취급받기 일쑤다. 박 의장의 신년 개헌 관련 발언도 주목을 끌지 못했다. 아시타비(我是他非) 논리가 적용된 탓이다.

지난 2017년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심상정 후보 모두 개헌을 공약했다. 그러면 적어도 문재인정부 임기 내 개헌이 이뤄지거나 개헌 시간표 정도는 나와야 정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공약은 공약(空約)이 됐다. 개헌을 얘기할 때 맨 먼저 거론되는 것이 권력구조다. 여론조사로는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하는 의견이 압도적인데도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통령 중임제, 홍준표 지방분권형 개헌, 안철수 분권형 대통령제, 심상정 의원내각제를 공약하는 등 권력구조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오랜 시간 ‘개헌=권력구조 개편’으로 인식돼 왔다. 으레 야당은 여권의 개헌 시도를 집권세력의 집권 연장 음모로 간주한다. 우리 개헌사의 학습효과다. 이승만의 재집권과 3선 출마를 가능케 한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3선 출마와 영구 집권의 길을 튼 3선 개헌과 유신 개헌, 전두환의 철권통치를 합리화한 5공 개헌 등 한 사람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위해 오염됐던 헌법이 여럿이다.

9차 개헌을 통해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6·10 정신이 녹아 있다. 단명한 이전 헌법과 달리 지금의 헌법이 34년째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명제에 지나치게 함몰된 나머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통령 5년 단임제라는 기형적 제도가 탄생했다. 독재와 장기 집권 방지라는 본래 취지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대통령과 국회 임기 불일치에 따른 국정 혼선과 연례행사화되다시피 한 선거 등 여러 부작용이 노정됐다.

시대 환경 또한 30여년 전과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에 걸맞게 기본권 확대를 비롯한 새로운 가치를 담아낼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장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은 물론 멀게는 탄소중립 시대의 글로벌 생태·환경 변화에도 대비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 그럼에도 개헌을 편협하게 권력구조 개편에만 초점을 맞춰 접근하니 공통분모를 찾는 작업이 여간 어렵지 않다. 국회의원직을 개인사업의 방패막이나 도구로 악용하는 함량미달자를 국민의 이름으로 소환하기 위해서도 개헌이 필요하다.

야당은 지난해 4·15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을 달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지금의 헌법이 바뀌어선 안 되는 절대선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국회 연설에서 ‘대한민국의 100년 미래를 이끌어나갈 미래지향적’ 개헌을 제의했었다. 비록 탄핵 국면전환용이었지만 당시 여당의 김무성 대표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추켜세웠다. 개헌을 집권세력의 전유물로 여긴 결과 여당일 땐 추진하다가도 야당이 되면 면을 바꾼다. 설사 여당이 개헌선을 확보했더라도 야당이 반대하는 한 개헌은 실현되기 어렵다.

기든스 패러독스. 기후변화 문제에 쓰이는 용어로 미래의 큰 위험보다 당장의 작은 이익에 매몰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당장의 정치적 유불리 때문에 미래지향적 개헌을 외면하는 정치권에도 적용된다.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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