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그래서 아이는 누가 키우나

국민일보

[돋을새김] 그래서 아이는 누가 키우나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입력 2021-01-19 04:02 수정 2021-01-19 04:02

‘정인이가 구조됐다면 우린 잘 키웠을까요?’

16개월 입양아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을 다룬 최근 국민일보의 이슈&탐사 보도는 반복되는 아동학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질문, 깨달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중요한 물음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정인이 사망의 1차 책임자는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이번 사건에서 정인이의 학대 정황은 제때 포착돼 적절한 방식으로 필요한 기관에 보고됐다. 어린이집 교사가 가장 먼저 정인이의 이상징후를 파악했고, 이어 지인이 용기를 냈으며, 마지막에는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소견을 보탰다. 어린이집·이웃·의료기관 3자가 모범답안처럼 움직인 거다.

8살 딸을 때려죽인 칠곡 계모 사건 이듬해인 2014년 도입된 아동학대처벌법은 신고 의무자 제도를 확대 강화했다. 사회는 가족 간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걸 넘어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 학대 신고는 시민의 의무다. 법이 선언했다. 획기적 변화였다. 2015년 인천 11살 소녀 탈출 사건 이후 장기결석 아동에 대한 전국적 전수조사 역시 기억할 만하다. 국가가 개별 가정의 문을 일일이 두드려 양육 상황을 점검했다.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세상이 금방 바뀌지는 않았다. 비극적이게도 그 증거가 정인이 사건이다. 무엇이 달라졌고, 그대로인 게 뭔지는 정인이가 온몸으로 보여줬다.

제대로 움직인 게 신고자였다면, 작동하지 않은 건 경찰이었다. 학대 신고를 세 번이나 받은 경찰이 왜 그처럼 무성의하게 반응했는지를 두고는 여러 지적이 나온다. 담당자가 매번 달랐고, 이전 사건 처리를 몰랐다고 하니 허술한 시스템과 전문성 부족이 겹쳤다. 학대를 판단하는 경찰의 눈높이도 너무 낮았다. 아마도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거다. 불과 몇 년 사이 체벌과 훈육을 바라보는 시민들 시선은 엄격해졌다. 반면 경찰 눈높이는 이상하리만치 옛날 그대로다.

이런 괴리, 경찰로 대표되는 현장의 지체는 일종의 병목 현상으로 보인다. 경찰은 아동학대 사건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지에 가깝다. 학대 아동을 찾아내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길고 긴 문제 해결의 시작이지 결말이 아니다. 부모를 학대 가해자로 만드는 순간, 아이를 치료하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모든 책임은 부모의 손을 떠나 누군가의 손에 인계돼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즉각 분리. 적어도 그게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방식 아닌가.

그때부터 아이는 학대와는 전혀 다른 문제에 부닥친다. 아이는 언제 어디로 가서 얼마나 머물 것이며, 누구와 어디에 정착해, 어떤 치료와 보호 및 교육을 받을 것인가. 때로 학대자는 아이에게 애착이 형성된 유일한 대상이다. 연령과 학대 정도, 가해자와의 관계, 주변의 지지, 아이 성향까지 정답이 없는 그 모든 요소를 고려해 누군가는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누구는 과연 누구인가. 공동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경찰 책상 위에 밀려든 학대 신고는 쌓이고 묵다가 흐지부지됐고, 애써 만든 변화는 허무하게 무력화됐다. 그 많은 사람이 경고음을 울렸건만, 정인이는 끝내 죽고, 모든 건 도로 원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실패는 가족의 비대화와 등을 맞대고 있다. 가족이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떠안는 책임은 점점 커진다. 성공적 양육이란 경제력부터 학력과 정보, 인맥, 외모, 지능까지 부모의 전 자원이 투입된 전면전의 결과물이다. 가족은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자주, 다양한 수위로 실패한다.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물어야 한다. 가족이 실패했을 때 아이는 누가 키울 것인가. 가족 밖에서 우리는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됐나. 그 답을 찾지 못하면, 그래서 실패한 가족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학대받는 아이도 끝내 구하지 못할 거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