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제주에서 백수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제주에서 백수

이원하 시인

입력 2021-01-20 04:05

시집과 산문집 작업을 모두 끝마치고 제주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지낸 시절이 있었다. 하루 조금 무리하고 놀아도 다음 날 푹 쉬면 되는 황금 같은 날들이었다. 아침마다 알람 소리 없이 잠에서 깨어나고 밥은 먹고 싶을 때 먹었다. 잔뜩 늦장을 부리다가 일어나면 음악을 듣거나 창밖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씻고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바다나 숲으로 가서 무작정 걷곤 했다. 외출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책을 읽거나 술 한잔 마시며 하루를 마감했다. 이렇게 살아도 내일 또 자유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무작정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처럼 등산 초보자가 한라산을 오르면 허벅지가 아파서 일주일은 걷기 힘들다는 걸 알았음에도 출근할 곳이 없으니 일주일 칩거할 생각으로 산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에 집중하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몽땅 날아갔다. 나쁜 기운이 빠져가는 기분에 신나서 쉬지 않고 산을 탔더니 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한라산 등반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 후폭풍으로 온몸의 근육이 아파서 일주일간 꼼짝도 못 했지만 그래도 잘만 살아지던 날들이었다.

제주에서 백수로 살던 시절이 요즘 그립다. 평범한 하루하루였기에 약간의 돈을 챙겨 모든 일을 뒤로하고 떠났었다. 지금도 가능한 삶이지만, 현재는 다른 꿈이 있기에 참아야 한다. 매일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날 제주의 모든 바람과 자연의 향기가 느껴진다. 아직도 내 곁에 있는 것 같다. 그리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은 뿌듯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 눈물이 차오르게 만든다. 내일 당장 제주로 떠나 과거의 삶을 그대로 실천해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날의 내 모습도 나중에 떠올리면 분명 그리울 만한 인생일 거다. 특별하지 않아서 절대 그립지 않을 것 같은 ‘오늘’이 말이다.

이원하 시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