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가족 잃고도… 낙인과 트라우마에 또 눈물 [이슈&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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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가족 잃고도… 낙인과 트라우마에 또 눈물 [이슈&탐사]

[치명률 1.2%에 가려진 비극, 그 후] 코로나 유족 5명의 10개월

입력 2021-01-20 04:02
이정미(54)씨는 지난해 3월 코로나19로 어머니(당시 80세)를 잃었다. 어머니 사망 나흘 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이씨의 아버지(당시 86세)도 4개월 뒤 코로나 후유증으로 숨졌다. 사진은 방호복을 입은 이씨가 대구 명복공원에서 어머니를 화장하며 기다리는 모습. 이정미씨 제공

대구에 사는 이정미(54)씨는 지난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코로나 1차 대유행이 정점이던 3월 2일 집에서 죽을 먹던 어머니(당시 80세)가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망 후 코로나 확진 판정이 내려졌다. 떨어져 살던 이씨가 대구 동산병원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관 안에 있었다. 병원 직원에게 사정을 하고 유리문 너머로 어머니를 봤다. “비닐백 속 엄마 시신을 본 건 3초였어요.” 지난해 3월 23~25일 국민일보 시리즈 ‘치명률 1.2%에 가려진 비극’에 그의 사연이 소개됐다.

이씨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한집에 있어 격리됐던 아버지(당시 86세)가 어머니 사망 나흘 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아버지는 4개월 뒤 세상을 떠나 어머니 곁으로 갔다.

지난해 3월 8일, ‘확진자’였던 아버지는 걸어서 구급차를 탔다. 직접 소지품을 챙겨 가방을 둘러멘 뒤 장갑과 마스크를 스스로 끼고 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혼자 낯선 지역의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싫다고 했다. 심장이 안좋긴 했지만 호흡기 관련 질환은 없었고 담배도 오래전에 끊은 상태였다. 이씨는 ‘입원해야 회복할 수 있다’면서 아버지 등을 떠밀었다.

금방 회복할 줄 알았지만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 달 후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 면회가 허용돼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제 발로 구급차에 올랐던 아버지 모습이 아니었다. 목 부분을 절개해 호흡기를 달고 있었고 의식이 없어 딸이 온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폐가 굳으면서 자가 호흡이 어려운 상태라고 했다.

이씨는 두 달 뒤 아버지를 대구의 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7월 19일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씨는 취재팀과의 통화에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막걸리 한잔 못 드시고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게 마음 아프다. 치료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드셨을지…. 억지로 입원시키고 고생만 하다 가시게 했다”며 자책했다.

아버지는 다행히 일반적인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사인이 ‘코로나’가 아닌 ‘코로나 후유증’이었기 때문이다. 시신을 염습하고 입관을 지켜보면서 이씨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어머니는 수의를 입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옷차림 그대로 화장됐다. 이씨는 어머니를 보낼 때 아버지가 걱정돼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이정미씨 어머니(왼쪽)와 아버지의 생전 모습.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부모를 잃은 이씨는 죄책감과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이정미씨 제공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하고 부모를 잃은 이씨의 마음에는 큰 멍이 남았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그는 그동안 일부러 몸을 더 많이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면 더 생각날 것 같아 바쁘게 일을 했어요. 몸이 힘드니까 잊히다가도 또 문득문득 생각이 나요.”

아버지 뒷모습을 닮은 자전거 탄 노인이 지나갈 때면 정신없는 하루에 큰 정적이 찾아온다.

그러고는 코로나19로 초라하게 부모를 보냈다는 죄책감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 잠을 편안하게 자본 적이 없어요. 머리만 대면 잤는데, 잠을 자면 중간에 꼭 깨요.” 한 번은 어머니가 초라한 차림으로 꿈에 나타나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이씨는 코로나 사망자의 가족이라는 주위의 불편한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의 사인이 알려지자 거래처 한 곳은 그의 주유소와 한동안 거래를 끊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인데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야속하고 억울했다. 서울 병원에서 아버지를 면회할 때는 사투리 쓰는 게 눈치 보였다. “당시엔 대구에서 왔다고 하면 ‘코로나 걸린 사람들’ 하면서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죠.”

이씨는 스스로 노이로제라고 느낄 만큼 코로나가 무섭다고 했다. 마스크를 3개씩 겹쳐 쓰고 주유소에서 손님을 맞는다. “부모님 두 분이 코로나로 돌아가셨으니까요. 간혹 손님들이 차 안에서 마스크를 끼지 않고 창문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겁이 나서 마스크 2개는 기본이고 3개씩 해요.”

애도 못한 죽음, 한(恨)이 되다

지난 1년간 코로나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망자 1200여명과 그 유족이다. 대부분 유족은 준비할 겨를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장례식을 비롯한 애도 절차가 생략된 경우가 많아 이들은 더 오랫동안 슬퍼한다. 자신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동시에 코로나 사망자의 가족이라는 낙인도 감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코로나는 공포의 존재다. 바이러스의 무서움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취재팀은 지난해 3월 ‘치명률 1.2%에 가려진 비극’ 시리즈 기사에서 인터뷰했던 유족 6명 중 5명을 10개월 만에 다시 접촉했다. 이들은 코로나가 남긴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구의 임정미(61)씨는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남편(당시 65세)과의 마지막 통화 녹음을 밤이면 다시 듣는다고 했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남편 음성은 언제나 다정하다. “나는 괜찮다. 밥은 먹었나. 내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맛있는 거 해 먹어라.”

남편은 코로나 확진 한 달 만인 지난해 3월 18일 숨을 거뒀다. 감염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입원해 있는 동안 가족들은 면회는커녕 임종도 못했다. 사망 소식을 듣고 가서 본 남편은 바싹 말랐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보통 아프면 곁에 보호자라도 있잖아요. 신랑 혼자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런데 통화하면 무조건 자기는 괜찮다고 하고….” 임씨는 병원에서 남편의 스마트폰을 돌려받지 못했다. 감염이 우려된다며 폐기한 스마트폰에는 남편의 사진이 있었다. 임씨는 남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괜찮다’는 목소리를 듣고 운다.

갑작스럽게 남편을 떠나보낸 임씨는 이사를 했다. 예전 집에 있으면 남편이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그래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수면제와 우울증 약은 이전보다 많이 먹는다. 길을 가다가도 남편처럼 키가 작거나 옷차림이 닮은 남자가 지나가면 자꾸 돌아보곤 한다. “병원에 가보니 우울증이라 하대요. 생전 좋아하던 젓갈이나 된장찌개 보면 신랑 생각이 나요. 못 해줬던 것만 자꾸 떠오르네요.”

지난해 3월 9일 아버지(당시 62세)가 사망한 이현수(41)씨는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신문을 보다가 “숨을 못 쉬겠다”며 쓰러졌다. 병원에 도착하고 1시간여 뒤 숨을 거뒀다. 사망 후 양성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19로 사망하면 ‘선(先) 화장, 후(後) 장례’를 한다. 염습과 입관식은 생략된다. 이씨는 국가가 정해준 절차에 따라 다음 날 바로 아버지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만 납골당에 안치했다. 감염병의 기세가 거셀 때라 장례식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코로나가 종식되면 추모제 형식의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소망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도 요원하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떠난 뒤 이씨는 허탈함과 무력감에 빠졌다. “‘열심히 살면 뭐하노.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해가 바뀌어도 코로나 사태는 여전하고 나아지는 게 없으니까요.” 최근 국내 사망자가 대구·경북 유행 때보다 몇 배 이상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씨는 “조금 더 빨리 확산을 방지하고 잡을 수 없었을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1일 86세이던 어머니를 잃은 성모(61)씨는 아직도 억울한 감정이 남아 있다. 어머니는 지난해 다니던 복지관에서 확진자가 나와 검사받고 집에서 대기하던 중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보건소는 사망 나흘 후에야 김씨의 휴대전화에 ‘양성 판정’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는 고혈압과 당뇨를 앓긴 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해 건강한 편이었다. 성씨는 “치료할 때를 놓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면서도 “병원에서 오래 고생하지 않고 가신 걸 감사하게 생각하자, 죽음을 받아들이자고 스스로 되뇐다”고 했다.

‘코로나 유족’이라는 낙인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뒤 사회에서 죄인이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유족과 거리를 두려 했다. 코로나 1차 대유행을 겪은 대구의 유족들은 더 큰 차별을 겪었다.

임정미씨는 남편을 화장하고 집에 돌아온 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참기 힘들었다. 그는 대구의 한 전통시장 인근에서 오래 살았다. 이웃이 다 아는 사람들이어서 소문은 빨리 퍼졌다. “외출할 때면 ‘즈그 신랑 코로나로 죽었다’는 안 좋은 시선이 느껴졌어요. 무슨 전염병처럼 신랑이 코로나로 죽으면 나까지 걸린 줄 알고 쳐다보는 게 싫었죠.” 임씨는 평소 다니던 목욕탕에도 발길을 끊고 집에만 머물렀다.

아버지를 여읜 이씨는 사망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자 신천지증거장막(신천지) 일원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대구에 오래 산 아버지를 신천지 신도로 오해하는 분이 많았다. 유족 입장에서 정말 화가 나고 싫었다”고 말했다. 이어 “꼭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아 감염되고 죽는 건 아닌데 마치 사망자의 잘못처럼 몰아 피해자인 유가족이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며 “국가 방역 시스템에 구멍난 것이 근본적 문제 아니냐”고 말했다.

지난해 3월 16일 아버지(당시 66세)가 사망한 서모(38)씨는 한동안 대구 출신임을 숨기고 살았다고 털어놨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남편과 함께 업무 차 지방을 다녔는데, 다른 지역의 한 주유소에서 사장이 ‘어디 가서 대구 사람이라고 하지 마라. 요즘 여기에선 대구 사람 아무도 안 받으려고 한다’는 충고를 건넸다고 한다. 코로나로 아버지를 잃은 그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서씨는 “지금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는 서울은 많이 신경 써주지 않느냐. 지나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지역 차별이) 짜증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유족들은 코로나에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성씨는 자신과 그의 가족이 대중교통을 일절 타지 않는다고 말했다. 30대 직장인인 두 딸의 출퇴근은 남편이 자가용으로 책임진다. 지난 10여개월간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를 제외하면 밖에서 운동도 식사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 의한 코로나19 감염이 두려워서다. 성씨는 “우리 집안은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굉장히 심하다. 거리두기 단계를 완화한다는데 또 확진자가 늘까봐 무섭다”고 했다.

집 안에 틀어박힌 성씨는 매일 코로나19 관련 방송 뉴스를 챙겨본다. 확진자와 사망자 추이부터 주요 집단감염 장소, 해외 백신 개발 소식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정보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빨리 국내에도 백신이 나와서 맞고 안전해질 수 있기만을 기다려요.”

서씨도 아버지를 잃고 나서 집에서는 종일 TV를 틀어 놓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듣기 위해서다.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지만 코로나에 당하지 않으려면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아버지) 생각이 나죠. 그래도 어느 동네에 확진자가 나왔는지 알아야 조심할 수 있으니 챙겨 봐요.” 서씨는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민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코로나19가 다시 확산하던 지난 연말 모임을 모두 취소하고 집에만 머물렀다.

대구 시립화장장인 명복공원의 직원들이 지난해 3월 18일 방호복을 착용한 채 코로나19로 사망한 고인의 시신을 옮기고 있다. 코로나 1차 유행이 한창이던 이날 명복공원에서만 8구의 시신이 화장됐다. 대구=방극렬 기자

국가 심리지원 체계 작동 안해

유족들이 2중, 3중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심리지원은 충분치 않다.

취재팀이 접촉한 유족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심리치료를 받고 있지 않았다. 일부는 개인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고통을 해결하고 있었다.

부모를 모두 잃은 이정미씨는 정부 심리지원 기관의 전화를 두세 차례 받았다. 하지만 무너진 마음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상담이라는 건 공감을 해 주는 거 잖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은 없고 형식적으로 전화를 하는 것 같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이겨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를 잃은 서씨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심리지원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사망 후 2개월여간 어두운 밤이 무서워 잠들지 못했다. 그 뒤로는 정반대로 기면증이 나타났다. 47㎏였던 체중은 43㎏까지 줄었다. 서씨는 “삶의 질이 많이 떨어졌지만 심리 상담은 받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알아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남편을 떠나보낸 임씨는 정부의 심리지원 대신 보름마다 한 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사비로 치료받느냐는 물음에 “병원에 공짜가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아버지를 여읜 이씨는 심리지원 관련 문자를 받았지만 오히려 그 문자로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고 했다. 그는 “나라에서 걱정한다고 문자는 매주 오는데 그게 더 스트레스다. 심리치료 받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1월 29일부터 국가트라우마센터, 국립정신의료기관, 광역·기초 정신건강복지센터로 구성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통합심리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다. 감염병 확산으로 극심한 불안과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조치다. 감염 확진자 및 가족, 사망자 유가족 등이 주요 지원 대상이다. 심리지원단에서 활동 중인 이다영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코로나 유가족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돼 무조건 (심리치료) 지원 대상”이라며 “연락처가 확보된 경우 100% 저희가 선제적으로 연락을 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심리지원을 받는 유족은 많지 않다. 지난 14일까지 심리지원단의 코로나 유가족 상담 건수는 75건이다. 심리지원단 측은 유족 명단과 연락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전문의는 “사망자가 약 1200명인데 사실 저희에게 들어온 유가족 명단은 5%가 채 안 된다”고 말했다.

심리지원단은 각 지자체에서 유족 명단을 넘겨받는다. 하지만 상당수 지자체가 업무 과중을 호소하며 명단을 넘기지 않고 있고 개인정보 문제로 공유를 꺼리는 곳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전문의는 “본부에서 (유가족 명단을 공유) 하라고 공문도 내리는데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 심리지원에 응한 유족 가운데는 슬픔과 황망함, 분노를 외부에 표출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전문의는 “가족이 코로나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에게 이를 드러내놓고 말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걸 들어드리는 것만으로 ‘속이 풀린다, 가슴이 시원하다’ 하면서 진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혼자 감내해야 할 당연한 고통이라고 여기기보다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역할 확대를 주문했다. 현진희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은 “유가족의 상실감과 해결되지 않은 애도는 우리 사회가 회복하고 통합해 나가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유가족이 도움을 청하면 제공하는 수동적 서비스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찾아가 발굴하고 제공하는 적극적 (심리지원)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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