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문 대통령의 솔직한 대화법

국민일보

[데스크시각] 문 대통령의 솔직한 대화법

남혁상 정치부장

입력 2021-01-21 04:02

역대 대통령의 집권 초기와 말기 대외정책 기조를 살펴볼 때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 게 한·일 관계다. 대통령들은 대부분 취임 직후 일본과의 관계 발전에 많은 공을 들였고, 어느 정도는 이를 유지했다. 하지만 결국 과거사 또는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경색 국면으로 집권 말기를 맞고 이를 다음 정부에 고스란히 물려주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어떤 이는 그 이유를 불행한 과거사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했고, 다른 이는 역대 정권이 비우호적인 국내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 것이라는 정치공학적 분석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이끌어내는 등 일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 발언에서 보듯 양국 관계는 굴곡을 면치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집권 첫해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도출해 양국 관계 발전의 큰 획을 그었지만 이런 관계가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의 독도 도발 등으로 갈등을 빚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은 셔틀외교 재개 등 한때 관계 진전을 보였지만 위안부 문제 갈등, 2012년 독도 방문이 이어지면서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던 한·일 관계를 물려받은 박근혜 대통령은 중반까지 같은 기조를 이어갔다. 그러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했고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많은 비판 속에 대통령 탄핵과 함께 사실상 사문화됐다. 이 합의의 사문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정치인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4월 대선 후보 시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합의”라며 무효 및 재협상을 주장했다. 한 달 뒤 대통령 취임 후 아베 신조 총리와의 첫 통화에선 “정서적으로 수용 못하는 합의”라고 했다. 그해 12월엔 “절차·내용적으로 중대한 흠결이 확인됐다”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최근 신년 기자회견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솔직히”라는 표현을 쓰면서 확연하게 방향을 선회했다. 한·일 관계 현안을 풀어가는 과정을 설명한 뒤 “그런 노력 중에 위안부 판결 문제가 더해져서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2015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 간 공식적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토대 위에서 피해자 할머니들도 동의할 해법을 찾도록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집행 단계 전에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3년여 사이에 한·일 관계 접근 방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왜 그런 변화가 필요했는지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설명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외교에는 상대방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 궁금증을 차치하고 보면, 집권 5년차 대통령이 최악의 한·일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고자 하는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이행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이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해 왔다. 앞으로 어떤 레벨에서든 협상과 대화가 이뤄지겠지만 협상 파트너가 있는 이상 일정 수준의 타협과 양보는 불가피하다. 정치 지도자가 현실을 인정하고, 결단하고, 또 이를 국민에게 설득하는 과정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5년여 전 위안부 합의를 이뤘던 박근혜정부는 정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국민 설득에는 실패했다. 문 대통령이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당사자부터 직접 설득해 보자. 전임 대통령들처럼 더 이상 나빠지기 어려운 양국 관계를 다음 정부에도 그대로 물려주기는 부담스럽지 않은가. 어려울수록 솔직한 대화법과 정치력이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남혁상 정치부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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