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핵 가방

국민일보

[한마당] 핵 가방

한승주 논설위원

입력 2021-01-22 04:03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 때 전임자에게 넘겨받는 것. 재임 기간 해외 순방이나 휴가 때에도 항상 갖고 다니는 이것은 ‘핵 가방(nuclear football)’이다. 대통령이 유사시 핵무기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미국 핵 가방은 약 20㎏의 서류 가방 형태로 되어있다. 가끔 미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 포스 원’에 군 보좌관이 핵 가방을 들고 대통령과 동행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된다. 도난방지를 위해 가방 손잡이와 군 보좌관의 손을 가죽으로 묶기도 한다.

핵 가방에 핵 발사 버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블랙 북’이라 불리는 핵 공격 옵션 책자, 비상시 대통령의 피난 장소 위치 및 정보 등이 담겨 있다. ‘비스킷’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핵 공격 명령 인증 보안카드도 들어 있다. 핵 가방이 처음 등장한 건 60여년 전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 구체적인 사용법이 만들어졌다. 핵 가방은 3개 또는 4개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가방은 부통령, 지정생존자로 정해진 내각 관료 가운데 한 명이 보관한다. 미 대통령이 핵 가방을 여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래서 핵 가방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가방, 판도라의 상자, 인류멸망 버튼 등으로도 불린다.

핵 가방이 가장 주목받을 때는 미 대통령 취임식이다. 취임선서 이후 대통령 권한을 위임받으며 핵 공격 개시 절차에 관한 브리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런 관례가 깨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자신의 사저가 있는 플로리다로 떠나버렸다. 핵 가방도 함께였다. 이날 낮 12시까지는 트럼프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취임식 때 트럼프가 갖고 간 것과는 다른 핵 가방을 받았다. 전임자의 것이 아닌 핵 가방을 전달받은 건 처음이다. 트럼프가 미국 민주주의 역사상 152년 만에 처음으로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하면서 세운 씁쓸한 기록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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