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김영춘의 호

국민일보

[한마당] 김영춘의 호

이흥우 논설위원

입력 2021-01-23 04:05

추사(秋史)로 잘 알려진 조선 최고의 명필 김정희는 추사 외에도 ‘완당’ ‘농장인’ ‘천축고선생’ 등 여러 호로 불렸다. 그 수가 무려 500개를 넘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처럼 조선 사대부들은 이름 외에 호를 하나쯤 갖고 있었다. 피휘(避諱)까지 있던 조선에선 이름 부르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 호나 자를 이름 대신 불렀다.

이 같은 관행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비교적 최근까지 주요 정치인과 경제인들도 호를 즐겨 썼다. 3김시대를 연 김영삼의 거산(巨山), 김대중의 후광(後廣), 김종필의 운정(雲庭)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호암(湖巖),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아산(峨山)도 세인에게 널리 알려진 호다. 두 그룹은 이병철, 정주영이란 본명 대신 ‘호암’, ‘아산’의 이름으로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치며 두 사람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인생의 이루고자 하는 바를 호로 삼은 경우도 있지만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의외로 많다. 거산, 후광, 아산이 그렇다. 김영삼은 자신이 태어난 거제와 정치적 고향 부산에서 한 자씩 따 호를 지었고, 김대중(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과 정주영(강원도 통천군 아산면)은 고향을 호로 삼았다. 이제는 다 옛날 얘기다. 요즘은 YS나 DJ, JP처럼 영어 이니셜로 부르거나 쓰는데 보다 익숙하다.

사실상 허주(虛舟)를 마지막으로 사라진 정치인의 호 문화가 얼마 전 되살아났다. 오는 4월 실시되는 부산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호를 ‘가덕(加德)’으로 지었다. 이제부터 자신을 ‘가덕 김영춘’으로 불러달란다. 부산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인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연결지어 표를 얻으려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가덕 신공항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를 백지화했던 국민의힘을 ‘감덕(減德)세력’이라고 비판했다. 호에는 거기에 걸맞은 사연이나 맛과 멋, 의미가 있기 마련인데 김 전 장관 호에는 정략만 물씬 풍긴다.

이흥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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