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천황 폐하

국민일보

[한마당] 천황 폐하

손병호 논설위원

입력 2021-01-26 04:03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99년 4월 방한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 국빈만찬 연설에서 “한국은 여왕 폐하께 영원한 친구의 나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정부 문서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를 ‘여왕’으로 칭했었는데, 김 대통령이 ‘여왕님’도 아니고 ‘여왕 폐하’라는 경칭으로 극진히 예우한 것이다. 영국과 함께 국왕이 있는 또 다른 나라가 벨기에다. 2019년 3월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벨기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마침 방한 중이던 필립 벨기에 국왕이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정경두 국방장관은 추모사에서 벨기에 국왕을 ‘필립 국왕 폐하’라고 역시 극존칭을 썼다.

일본도 왕이 있는 나라다. 현지에선 ‘천황’이라 부른다. 주일 한국대사관도 현지 사정에 맞춰 일왕에 대한 공식 표기로 천황을 쓴다. 그런데 강창일 신임 주일대사가 지난 22일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도착 인사를 하던 중 나루히토 일왕을 ‘천황 폐하’로 지칭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천황이라 한 것도 못마땅한데, 폐하까지 붙인 건 굴욕이라는 지적이다. 야당은 “토착왜구니 죽창가니 하며 반일 프레임을 쓰던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돌변해 천황 폐하라고 하느냐”고 조롱했다. 강 대사 본인부터 평소 “일왕은 일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창해온 사람인데, 천황도 아니고 천황 폐하라고 하니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다.

강 대사의 달라진 태도가 꼭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돌변도 필요한 게 외교다. 수교 이후 최악인 현 한·일 관계를 어떻게든 풀어 종국에는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한 차원의 돌변일 것이다. 직업 외교관이 아닌 정치인 출신이어서 더더욱 파격적인 행보를 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국익에 좋다면야 ‘정치인 강창일’쯤은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강 대사와 한국 정부의 성의에 일본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바란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틀에 갇힌 외교에서 벗어나 일본도 ‘돌변’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손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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