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상품권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상품권

오병훈 수필가

입력 2021-02-08 04:07

슈퍼에서는 종이상자 같은 잡다한 폐지가 많이 나오게 마련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작은 손수레를 끌고 와 폐지를 수거해 간다. 슈퍼 주인은 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종이상자를 흩어놓거나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마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자를 묶었던 비닐 끈을 잘 간추려 놓기도 한다. 그래서 노인이 올 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사나흘 동안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폐지를 가져가려고 하면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종이상자가 쌓이게 돼 결국 수거하는 사람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기온이 떨어져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노인이 수레를 끌고 다시 나타났다. 어디서 몇 장의 종이상자를 모았는지 빈 수레는 아니었다. 한참 동안 폐지와 비닐 끈 같은 것을 분류해 놓은 뒤 필요한 것을 수레에 실었다. 노인으로서는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은 짐을 실었다.

작업을 하다 말고 노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어디 편찮으셨어요.” 몸이 불편한 아내와 둘이 사는데 상수도까지 터져 고생했다고 말했다. 노인은 작은 봉투를 들고 있었다. 내용물을 이미 확인한 듯 “이런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려서 얼마나 고심하셨어요.” 노인이 내민 봉투 안에는 상품권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그제야 얼마 전에 딸과 사위가 왔을 때 구두라도 한 켤레 사라는 생각이 났다. 어떻게 해서 이 상품권이 폐지에 섞여 들었을까. 슈퍼 주인은 그동안 노인에게 무례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있었던 일을 마음으로나마 사과한다는 뜻으로 상품권 두 장을 내밀었다. 노인은 남의 물건이니 당연히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두 손을 들어 사양했다. 안으로 들어갔던 주인이 노인의 짐 위에 라면 한 상자를 올려놓았다. 그제야 노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설을 앞둔 터라 봄날처럼 포근한 오후였다.

오병훈 수필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