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죽은 뒤 보약이 무슨 소용인가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죽은 뒤 보약이 무슨 소용인가

입력 2021-02-10 04:20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국가가 빚을 내지 않으면
가계가 빚을 떠안아야 하는
제로섬 구조

우리의 경우 주요국과 반대로
부채 비율 국가 낮고 가계는 높아

가계 귀책사유 아닌 이유로
가계부채 늘어나는 일 없어야

6·25전쟁은 지구 건너편 영국에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사회보장 분야에 국가 재정의 20%를 투입하던 때였다. 그런데 6·25로 상황이 반전됐다. 6·25에 참전하면서 늘어난 군비 충당 문제를 놓고 내부에서 거센 논쟁이 일었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사회보장비를 삭감해 군비를 충당했다. 이에 노동장관이 사퇴하는 등 영국 사회의 후유증이 컸다. ‘대포냐, 버터냐(guns or butter)’ 용어를 탄생시킨 그 사건이다.

재정은 유한하다. 그래서 정책 입안자들은 늘 대포와 버터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대포를 늘리면 버터가 줄고, 버터를 늘리면 대포가 준다. 제복조는 대포를 늘리는 쪽에, 양복조는 버터를 늘리는 쪽에 서기 마련이다. 현재진행형인 사회적 거리두기 논란도 마찬가지다. 방역 측면에선 봉쇄 강화가 정답이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선 마이너스다. 정답을 찾기 어려운 제로섬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는 논쟁이다.

4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둘러싼 정치권 논쟁이 뜨겁다. 여야 간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다양한 주장이 쏟아진다. 요약하면 여당은 선별·보편 병행 지원, 야당은 선별 지원에 방점을 찍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의 기본소득 공방도 치열하다. 이 같은 여권 내부 및 여야 논쟁은 코로나 비상시국에 유한한 국가 재정을 어떻게 배분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지에 대한 정책 대결이다.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북한 원전 공방에 비하면 훨씬 생산적이고 건설적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여당으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고 한 말이 미움을 샀다. 이 대표가 선별·보편 병행 지급 방침을 밝히자마자 홍 부총리가 브레이크를 걸었으니 여당으로선 뿔날 만도 했다. 홍 부총리도 할 말은 있다. “재정을 맡은 입장에서 재정수지나 국가채무 등 건전성 문제를 같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도 헤아려 달라.”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로서 나라 살림을 흑자로 반전시키지는 못할망정 본인 재임 시 나라 살림을 거덜낸 장본인이라는 오명을 듣기 싫었을 게다. 그 속을 몰라 주고 한두 번도 아니고 곳간을 털라고 계속 몰아붙이는 여당이 야속하겠다. 재정적 관점에선 홍 부총리 말이 다 맞는다.

그러나 그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반론 또한 만만찮다. 지난해 우리 경제가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역성장한 가장 큰 요인은 소비 부진에 있다. 소비 부진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플러스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축된 소비심리가 되살아나야 한다. 코로나 사태가 정부 책임은 아니지만 가계의 책임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코로나로 발생한 손실을 누가 떠안는 게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핀셋 지원엔 여야 간, 여권 내부의 이견이 없다. 하지만 핀셋 지원은 정부의 집합금지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이들의 최소한의 생존권을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 이상, ‘+α’가 필요하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은 소비할 여력이 부족하다. 정부가 빚을 지지 않으면 가계가 빚을 져야 하는 구조다. 여기서 그 부담을 정부와 가계 중 누구에게 더 지우느냐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국가부채 비율은 국내총생산(GDP)의 40.5%로 OECD 35개국 가운데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1위 일본(237.5%)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미국(106.7%) 영국(85.6%) 독일(56.9%) 등 주요국에 비해서도 낮다. 반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1.1%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다. 지난해 11월 국제금융협회가 발표한 ‘글로벌 부채 모니터’에 따르면 우리나라만 100%를 넘었다. 미국, 일본, 유로존 국가들의 60~80%에 비하면 꽤 높은 수준이다. 여당이 재정 당국보다 확장적인 재정 정책을 밀어붙이는 까닭이 우리의 낮은 국가부채, 높은 가계부채 비율에 있다.

부채에 대한 가계의 내성은 국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국가부채는 상환 연기나 돌려막기가 용이하나 가계는 그렇지 못하다. 가계의 파산은 곧바로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 가계의 귀책사유가 아닌 이유로 가계부채가 증가하는 일은 최대한 막아야 한다. 아무리 비싸고 좋다한들 죽은 뒤 보약이 무슨 소용인가.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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