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용서받지 못한 자

국민일보

[가리사니] 용서받지 못한 자

양민철 정치부 기자

입력 2021-02-22 04:03

남자 프로배구 한국전력의 간판 공격수 박철우가 KB손해보험 이상열 감독을 향해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작심 비판을 쏟아낸 것을 보면서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낀다. 박철우는 2009년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이 감독에게 왼뺨과 복부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 이 감독은 무기한 자격정지를 받았지만 2년 만에 슬그머니 배구계로 복귀했다. 이젠 어엿한 프로팀 감독이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배구계를 뒤흔들고 있는 ‘폭력 미투’에 대해 “가해자는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했다. 박철우는 이 말을 듣고 “(마음 속) 흙탕물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게 휘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박철우는 지난 18일 OK금융그룹을 3대 1로 꺾은 뒤 인터뷰를 자청했다. 진 팀은 카메라 앞에 서지 않는 게 관례라 꼭 이기고 싶었다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분(이 감독)이 그 일로 반성하고 더 나은 지도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한테 ‘너 진짜 박철우 (폭행 사건) 아니었으면 처맞았다’ ‘몇 대 맞았다고 뛰쳐나가는 놈이 선수냐’라고…. (중략) 한국 스포츠계는 달라져야 합니다. 기절하고 쓰러지는 선수가 나오는데도 사랑의 매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동갑내기 배구선수의 한 맺힌 목소리를 들으며 최근 꼬리를 무는 폭로에 피로감을 느끼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12년 전 기자회견 영상을 찾아봤다. 왼뺨에 새빨간 멍이 든 박철우는 피를 토하듯 말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 얼굴을 보여주기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프로생활 17년 차 베테랑이자 두 딸 아빠인 박철우가 아직도 흙탕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건 배구뿐 아니라 국내 스포츠계가 여전히 맞고 때리는 악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나라 조직문화의 전근대성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육체적 폭력이든 정신적 괴롭힘이든 이를 용인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한다. 병든 땅 위에 ‘나도 맞고 컸다, 너도 맞아야 자란다’는 궤변이 가지를 뻗는다. 정신 무장과 실력 도모, 분위기 쇄신 등의 썩은 열매는 이를 합리화한다. 관습이 깨지면 조직이 무너진다는 정체불명의 우려는 가해자 악행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뿐이다. 언론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이 개선됐다지만 수습기자 때 잠도 못 자고 욕설과 모욕적 발언을 감내하는 것이 통과의례였다. 극한 상황을 이겨내야 취재력이 쌓인다는 게 이유였다. 수습 꼬리를 뗀 뒤에도 마찬가지다. 강압적 문화와 부조리에 못 이겨 업계를 떠난 선후배가 적지 않다. 너는 단호히 ‘노’라고 외쳤느냐 묻는다면 자신은 없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보다 교육을, 윽박지르기보다 조언을 건넨 선배들이 있었다. 기자로서 자세와 취재 노하우는 모두 이들에게서 배웠다.

유명 선수들의 폭력 미투로 쑥대밭이 된 배구계에도 희망은 남아 있다. 지난 17일 데뷔 11년 차 GS칼텍스 센터 김유리가 첫 경기 MVP로 선정된 날, 차상현 감독과 코칭스태프, 외국인 선수 메레타 러츠까지 둥글게 모여 그의 인터뷰를 응원했다. 김유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2010년 신인 전체 2순위로 데뷔했다가 선배의 괴롭힘에 못 이겨 두 시즌 만에 은퇴했던 그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코트로 돌아왔고, 이젠 고참 선수가 돼 끈끈한 팀워크를 이끌고 있다. GS칼텍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일찌감치 확정하고 우승을 정조준하고 있다.

체육계 병폐를 죽음으로 고발한 최숙현 선수의 이름을 딴 법이 지난 19일 시행됐다. 인권침해 행위 조사, 가해자 복귀 제한 등의 조치가 담겼다. 법으로 누르면 끝일까. 폭력을 약물처럼 신봉하는 구태를 체육계 스스로 잘라내지 않는다면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피멍에 눈 감고 메달만 찾던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도자와 선수는 주종 관계가 아니다. 역대 스포츠 스타 중 “맞아서 이렇게 됐다”고 말한 사람을 나는 본 일이 없다.

양민철 정치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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