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지옥’… 정신질환 산재 신청 해마다 급증한다 [이슈&탐사]

국민일보

‘회사는 지옥’… 정신질환 산재 신청 해마다 급증한다 [이슈&탐사]

[일이 부른 마음의 병] ② 업무로 힘든 당신, 이러면 산재

입력 2021-02-22 04:02
업무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이 생겼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정신질환 산재 인정 비율도 점차 높아져 지난해에는 신청 건의 67.2%가 승인됐다. 사진은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동작대교에서 연출된 장면. 윤성호 기자

2017년 봄, 온라인 게임 회사에 다니던 양원영(가명)씨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양씨 부모는 자식의 죽음이 업무 탓이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하지만 공단 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는 이를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양씨는 국민일보 취재팀이 스트레스 요인과 경로를 분석한 자살 노동자 142명 중 한 명이다(국민일보 2월 18일자 1·4·5면 참조). 양씨의 업무상질병판정서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양씨가 주당 평균 54.73시간 일하는 등 과중한 업무적 부담에 시달린 것이 정신질환과 자살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양씨는 사망 전 온라인 RPG 게임의 배경을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5년간 게임 출시를 준비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렸다. 공황장애로 여러 차례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우울감을 토로했다. 숨지기 6개월 전에는 회사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15분간 갇히는 일을 겪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발작이 일어나 구조 직후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날 이후 회사에서 실신하고 조퇴하는 일이 반복됐다. 사망 한 달여 전 게임이 출시됐지만 시장 반응은 차가웠다. 양씨는 권고사직 조치를 받았다.

공단 질판위는 산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양씨가 정신질환을 얻게 된 데는 개인적 이유가 더 컸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시절 겪은 성추행과 내성적인 성격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질판위는 “다양한 개인적 소인과 경험의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질판위 판정은 법원에서 뒤집혔다. 유족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업무와 사망 사이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불승인 처분을 취소했다. 양씨의 죽음이 업무 탓이었다는 얘기다. 법원은 “엘리베이터 사고와 업무상 스트레스가 경합하여 내재해 있던 공황장애의 소인이 급격히 악화됐다”고 밝혔다. 개인사가 사망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업무와의 관련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스트레스 촉발 사건 있으면 승인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정신질환 산재를 신청한 사람은 2016년 169명에서 지난해 558명으로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불과 4년 만에 3배 넘게 증가했다. 산재로 인정된 비율도 2016년 41.4%에서 지난해 67.2%로 증가하는 추세다. 그렇지만 정신질환 산재는 여전히 기준이 모호하다. 뚜렷한 외상이 생기는 신체적 산재와 달리 마음의 상처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양씨 경우처럼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다가 소송을 통해 인정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취재팀이 2018~2020년 4월 업무상 자살로 산재를 신청한 업무상질병판정서 142건과 2017년 업무상 정신질환(자살 제외) 관련 판정서 123건, 2019~2020년 정신질환 및 자살 산재 관련 판결문 29건을 분석한 결과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불러온 결정적 사건이 있었던 경우 승인 비율이 높았다. 2018년 2월 숨진 우준병(가명)씨에겐 ‘인사 발령’이 그런 사건이었다. 공공기관에서 12년간 홍보·기획 업무를 담당하던 우씨는 사망 두 달 전 재무 부서로 발령됐다. 회계, 급여, 결산 등 낯설고 민감한 업무를 맡게 된 그는 좀처럼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에 매달리고, 후배들에게도 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우씨의 사망 전 1주일간 근로시간은 62시간이 넘었다.

동기들보다 승진이 늦었던 우씨는 ‘만년 과장’으로 남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 극심한 스트레스를 토로했다. “이번 주에 급여 업무하는 걸 보고 나더러 다음 달부터 하라는데 엄청 복잡하고 수작업도 많아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임자는 자기도 바쁘니 알아서 하라더라. 꿈이라면 깨고 싶지만 답답할 뿐이네.” 극단적 선택 하루 전 우씨는 금전 관련 일 처리가 잘못돼 민원을 받았다. 질판위는 우씨의 사망을 산재로 인정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별표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적응장애, 우울증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질환으로 명시돼 있다. PTSD는 2013년, 적응장애와 우울증은 2016년 별표에 포함됐다. 한 대기업 계열사 부서장으로 근무하던 고웅래(가명)씨도 우울증·적응장애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그는 2016년 갑작스러운 사내 감사 통보를 받았다. 일면식도 없던 감사관들이 ‘기본이 안 된 것 아니냐’ ‘중고등학생도 안 그런다’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로 추궁하며 잘못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고씨는 “23년간 회사에서 여러 실적을 냈는데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울분이 치밀었다. 그는 감사가 끝난 뒤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통원 치료를 받게 되자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질판위는 “부당한 감사 방법 및 이에 따른 갈등이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앞으로는 ‘직장 갑질’에 따른 산재 신청과 승인이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2019년 산재보험법에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발생한 질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과로’했지만 죽은 건 네 탓?

직장에서의 모든 정신질환과 자살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업무 관련성’이 확인돼야 산재로 인정된다. 지난해 정신질환(자살 포함)으로 산재를 신청한 558건 가운데 183건(32.8%)은 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근무 도중 정신질환이 발병·악화했다고 해도 질판위가 가족력, 금전 문제 등 개인적 취약성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승인은 어렵다.

한 연구소 팀장이던 심종성(가명)씨는 2012년 말 담당해온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실패로 큰 타격을 받았다. 주 6일씩 근무하며 몰두하던 사업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상사는 권고사직을 당했고 새로 온 상사는 심씨를 괴롭히고 성과를 가로챘다. 아내와 동료에게 일이 힘들다고 호소하던 심씨는 이듬해 4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질판위는 유족의 산재 청구에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질판위는 "연구 실패, 직장 내 직원과의 갈등, 해고 불안감 등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있었다"면서도 자살에 이를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대신 아파트 대출금 6000만원을 언급하며 개인적 취약성에 의한 우울 상태가 사망 원인이라고 말했다.

강철민(가명)씨의 유족들도 '업무 스트레스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강씨는 13년간 건설사에서 근무하며 과다한 업무에 시달렸다. 회사 규모에 비해 직원은 항상 부족했다. 강씨는 늘 사무실에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 퇴근했다. 일에 짓눌리던 강씨는 어느 날 임원에게 공개적으로 심한 질타를 받았다. 이후 무단결근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업주는 강씨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다고 진술했다. 질판위도 "스트레스 수준이 높은 상태에서 과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봤다. 질판위는 그러나 "2004년부터 장기간 지속적으로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던 상황에서 이 사건으로 정신적 이상상태를 유발할 정도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불승인 조치를 내렸다.

전문가들은 질판위의 판정이 업무 스트레스와 개인적 취약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취재팀 분석에서도 '업무 스트레스가 개인적 취약성을 심화시켰다'며 산재를 승인한 사례가 있는 반면 '개인적 취약성에 의한 우울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며 불승인한 사례가 발견됐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는 "업무상 사망에 있어 개인적 취약성을 어디까지 볼 것인가에 대한 질판위의 기준이 없다. 어떤 성향의 위원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개별 판정이 엇갈린다"고 지적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당사자나 유족은 '네가 약한 탓'이라는 질판위의 판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판정에 불복해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 경우가 2016~2020년 124건이다. 이 가운데 근로복지공단은 44건(35.4%)에서 패소했다. 같은 기간 공단 평균 패소율 14.9%의 두 배가 넘는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2018년 펴낸 보고서에서 "과거력이나 가족력이 불승인의 근거가 된다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고, 업무 스트레스 상황이 명확하면 승인하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과거보다 업무상 요인이 중시되면서 산재 인정 건수·비율은 오르는 추세다. 김형렬 가톨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예전에는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회적 문제 제기가 잇따르며 기준이 점차 완화되고 있다"며 "업무적 위험요인을 판단할 수 있는 예시적 기준을 확립해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부싸움, 알코올 중독은 산재 아니다

업무와 무관한 개인적 요인이 명백하게 작용하는 경우는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은 음주 습관, 사생활 문제 등이 정신질환·자살의 원인이 됐다면 산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파트 관리직원 용석준(가명)씨는 퇴사 7개월 후 극단적 선택으로 숨졌다. 유족은 "아파트에서의 24시간 교대근무가 스트레스·알코올 중독의 원인"이라며 산재를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용씨가 수년간 근무하며 매일 소주를 2병 넘게 마신 사실과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알코올 의존 증후군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사실이 고려됐다.

홍옥주(가명)씨도 "업무 스트레스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다"며 산재를 신청했으나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질판위는 '직속 상사의 휴직, 직원들의 잦은 퇴사로 1년여간 과도한 업무를 맡았다'는 그의 주장보다 집안일과 관련해 남편과 싸운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가 살아난 점을 더 결정적인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봤다.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더라도 부당한 대우나 압박이 없었고 오히려 배려를 받았다면 산재로 인정되지 않았다. A씨는 차별적인 업무 배정과 부서 이동, 부당한 인사 평정 등으로 공황장애, 적응장애를 앓게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과 1, 2심은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가 자원한 부서에 가서도 계속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직원보다 업무량이 크게 적었는데도 네 번 연속 하위 5% 평정을 받았다는 점이 고려됐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상사들은 일반 직원이 1주일 만에 처리할 업무를 A씨에게는 1개월을 주며 맡겼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전화 1588-9191, 청소년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

[일이 부른 마음의 병]
▶①죽음으로 내몬 업무 스트레스 ‘일의 타살’ [이슈&탐사]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