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외로운 부자를 위한 서비스

국민일보

[혜윰노트] 외로운 부자를 위한 서비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입력 2021-02-26 04:07

미팅이 있어 오랜만에 호텔에 갔다. 로비의 높은 천장과 대리석 바닥, 트렌드를 반영하는 비싼 가구들, 적당한 온도와 음악, 생기를 더해주는 생화 장식, 조심스럽고 일사불란한 스태프의 움직임이 명성을 유지해 온 호텔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밖은 추운 날이었지만 로비에는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투숙객도 보였다. 일행 중 한 명이, 코로나로 매출이 줄긴 했겠지만 호텔의 단골 고객인 ‘외로운 부자’들이 받쳐주는 기본 매출은 여전하다는 얘기를 했다.

며칠 동안 ‘외로운 부자’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외로운 부자’를 떠올려 봤다. 부자들이 모두 외로운 건 아니겠지만, 부자라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좋은 집이 있어도 그 집에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다정하게 호응해 줄 사람이 없고, 비싼 주방 가전들이 있지만 정성 들여 맛있는 요리를 해 줄 사람은 없는 경우다. 하지만 호텔에 오면 언제나 쾌적한 환경에서 이름난 요리사가 내오는 음식을 골라 먹고, 상냥한 스태프와 말동무도 할 수 있다. 운동과 마사지는 물론이고 각종 취미생활도 즐길 수 있다.

대학 때 등록금 인하 시위가 한창이었는데, 재단 이사장이 모 호텔의 스위트룸에 수년째 장기 투숙하는 비용을 학교 재정에서 지출한다는 학생회 발표가 있었다. 이사장 측의 답변은 독신인 이사장이 품위 유지를 위해 큰 집을 소유하고 가사도우미, 정원사, 요리사 등을 두며 사는 것이 낭비라 생각되어 불편함을 감수하고 호텔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방에서 막 올라와 호텔을 드라마에서만 봤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돌이켜보니 ‘외로운 부자’였을 이사장 입장에서는 가능한 선택일 수도 있었겠다. 자신의 주거형태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니까. 물론 어떤 선택이든 본인 주머니에서 지출했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영화 ‘유스’도 생각난다. 은퇴를 선언한 유명 지휘자가 친구들과 스위스의 고급 휴양 호텔에 머문다. 공기 좋은 곳에서 산책과 마사지, 수영, 건강체크 등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그곳엔 대화를 잊은 부부를 비롯해 열정과 사랑을 잃어버린 외로운 부자들이 가득하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도 외로운 부자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지배인 구스타프는 외로운 VIP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게 일이었다.

몇 년 전 일본의 고급 리조트에서 하루를 보냈다. 한참 숙박 서비스에 관심이 많을 때라 소문을 듣고 ‘얼마나 좋길래’ 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강 건너 숲 속에 있어 잠시 배를 이용해 도착한 호텔은 각각 독채로 이루어져 있었고 객실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다다미방은 단정하고 깨끗하지만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창문 가득한 자연과 오디오에 걸린 명상 음악, 포근한 침구는 위로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비가 오기 시작하니 우산을 들고 산책로로 나온 직원들의 조용하고 세심한 친절이 여행자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배를 타고 나오는데 한참 후에 무심코 돌아보니 그때까지도 호텔 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배웅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일까 싶어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물론 계산된 서비스겠지만 어떤 화려한 시설보다 사람이 제공하는 환대와 배려가 더 비싼 서비스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던 날이다.

전에는 허름해도 내 집이 최고라는 말을 자주 했다. 반갑게 맞아줄 가족이 없는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호텔의 인기는 더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아무리 비싼 값을 내고 얻는 친절과 서비스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애정, 편안함과 따뜻함만 못할 것이다. 물론 나의 가까운 20대 청년은 “외롭더라도 부자가 좋겠어요”라고 말했지만, 그렇다면 외롭지 않은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아니어도 가까이에 늘 다정하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기를, 배려하고 환대 받기를.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