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기억 속 폭력

국민일보

[세상만사] 기억 속 폭력

김현길 문화스포츠레저부 차장

입력 2021-02-26 04:03

거의 매일 새로운 이름이 오르내린다. 쌍둥이 배구 선수가 과거 학교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는 수많은 부메랑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포털 연예·스포츠 뉴스 화면엔 새 학폭 의혹, 이를 부인하거나 사과하는 말들이 제목에 담겨 ‘많이 본 뉴스’ 코너를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응은 나뉜다. 더러는 인정한 후 사과하고, 더러는 부인하고 법적 대응에 나선다고 한다. 진위에 따라 부메랑은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혹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할 것이다.

‘학폭 미투’의 진위는 가려야 하겠지만, 이제까지 나온 내용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학창시절이 폭력의 시간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학폭 가해자들이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 될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은 게 아니라면 드러나지 않은 가해자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임은 폭력이 일어난 시절에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폭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학교와 어른들은 이 문제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 책임이 덜어질 순 없다. 가해자는 폭력의 출발점이면서 이제까지 이를 바로잡지 않은 잘못까지 함께 져야 한다. ‘그 정도까지인지 몰랐다’ ‘장난이었다’는 말은 피해자나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책임을 인정하기 힘든 것은 현실적인 이유도 클 것이다. 실력 못지않게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이들에게 가해자라는 낙인은 치명적이다. 공소시효도 지났고, 엄밀한 증거도 찾기 힘들다면 일단 부인하고 잠잠해지길 기다리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기억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쌍둥이 배구 선수한테 피해를 당한 이의 글은 이를 잘 드러낸다. 해당 피해자는 “10년이 지난 일이라 잊고 살까도 생각해봤지만 가해자가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은 생각하지 못하고 SNS에 올린 게시물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스쳤다”라고 썼다. 잠잠해져 영원히 재론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제고 피해자들의 기억에 스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입장을 헤아린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순서다.

해소되지 않은 폭력의 지속성과 사과의 필요성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글이 참고가 될 것 같다. 가늠하기 힘든 폭력과 참혹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틴 레비의 상황과 비교하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지만 ‘주기율표’(돌베개)에 나온 사례는 폭력과 기억, 용서와 화해의 속성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레비는 수용소 실험실을 책임졌던 독일인 뮐러를 종전 후 맞닥뜨린 경험을 전한다. 뮐러에게 ‘매일 1만명을 집어삼킨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을 알고 있는지 등을 물었지만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뮐러는 “전 인류의 탓”으로 돌렸고, 무엇보다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그 어떤 활동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와의 일을 전한 레비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이번 사태에서 긴 시간의 거리를 두고 피해 사실을 알린 이들이 공통으로 언급한 건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첫발을 떼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확해 보인다.

김현길 문화스포츠레저부 차장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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