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가공할 만한 일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가공할 만한 일

요조 가수·작가

입력 2021-03-05 04:06

어릴 때 만화책을 보면서 좋아했던 표현 중 하나는 ‘가공할 만한’이라는 말이었다. “가공할 만한 녀석이 나타나고야 말았어!” 같은 대사들을 언제나 경이롭게 읽곤 했다. 현실에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던, 그래서 어쩐지 늘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스럽게 여겨지던 말. 지금도 일 년에 몇 번 쓸까 말까, 들을까 말까 한 말이지만 여전히 ‘가공할 만한’이라는 표현은 극진하게 다루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가공할 만한’이라는 말이 무엇을 수식하게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한 모든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를테면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고 있는 서울 노원역의 단골 떡볶이집 사장님이나 글 쓰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매년 묵묵하게 책을 만들어내는 걸 멈추지 않는 동료 작가들. 혹은 그만두고 싶어 끙끙대면서도 10년 가까이 한 직장에 출근 중인 내 친구.

또 몇 년간 부모님댁에 놀러갈 때마다 멀리서 마주치는 줄넘기 하는 한 여성분과 자신의 마음을 울린 어떤 예술가에게 자신의 매일매일을 바치는 세상의 모든 덕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배추 한 통을 사서 그걸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서 끝까지 다 먹어치우는 사람들. 그들의 씩씩한 등에 ‘가공할 만한’이라는 표현을 흡족한 마음으로 착, 착, 착, 붙여주고 싶다. 이토록 현실에 낭비 없이 닿아 있는 존재들과 나의 가장 판타지적 단어가 찰싹 어울릴 수 있다니, 극과 극은 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가 보다.

앞으로 이 지면에 글을 쓰게 됐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하고 성실하게 글을 써야 하는 일은 내게 충분히 가공할 만하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 전에 그간 만화책 속에서 우러러 읽기만 했던 말부터 일단 비장하게 발음해보고자 한다. 드디어 가공할 만한 일이 나타나고야 말았어!

요조 가수·작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