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절차적 정당성

국민일보

[뉴스룸에서] 절차적 정당성

모규엽 사회부 차장

입력 2021-03-08 04:06

사회학에 ‘절차적 정당성’이란 용어가 있다. 절차적 정의라고도 불리는 이 말은 실질적 정당성과 함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핵심 요소다. 사회적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 두 가지 정당성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절차적 정당성은 문제나 갈등 해결 과정에서 적절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실질적 정당성은 문제나 갈등 해결의 결과가 형평성 있고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은 ‘수단’, 실질적 정당성은 ‘목적’에 해당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정당성이 잘 굴러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더라도 수단이 바르지 못하면 사회정의와 쟁점은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절차적 정당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 자주 생긴다. 지난달 말 법원은 자율형사립고 지정 취소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정부의 고교 평준화 정책은 제동이 걸리게 됐다. 법원이 판결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절차적 정당성 결여였다. 재판부는 교육청이 변경한 자사고 평가 지표가 너무 늦게 공표되는 등 교육청의 재량권이 남용됐다고 적시했다. 고교 평준화 정책이라는 목적만 중요시해 그 절차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월성원전 사건도 마찬가지다.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공무원들은 원전 폐쇄를 미리 결정해 놓고 이에 맞춰 경제성 조작 등을 자행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떠난 만큼 수사는 제동이 걸리겠지만 원전 폐쇄라는 명제의 대의는 이미 크게 훼손됐다.

지난해 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윤 전 총장 징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여권은 윤 전 총장을 몰아내 검찰 개혁을 이루겠다는 대의명분을 가졌지만 그 과정은 졸속이었다. 징계 사유부터 이게 정말 징계 사유가 되는지 여러 논란이 있었다. 또 징계에 반발해 고기영 법무부 차관이 사퇴하자 곧바로 친정권 인사인 이용구 현 차관을 임명했다. 검사징계위원회는 모두 윤 전 총장과 대척점에 있는 인사들로 채워졌고, 2개월의 정직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결국 법원이 정직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해 윤 전 총장은 직무에 복귀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 의혹 사건의 본질도 사실 절차적 정당성의 결여 여부다.

현 정부도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은 알고 있는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 전 총장 징계 사태 때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징계위원회는 더더욱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하지만 많은 여권 인사들은 목적성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회주의적 사상이 사고를 지배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사게 할 정도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초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학의 사건에 대해 “경찰의 부실 수사와 진실에 눈감았던 검찰 수사팀에 대해서도 실체적 정의 측면에서 들여다보는 것이 균형에 맞는 처사”라고 했다.

최근 선거를 앞두고 여권은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된 모습이 나온다. 법무부도 지난달 19일 국회 가덕도신공항특별법 심사 법안소위에 제출한 검토 보고서에서 “적법 절차와 평등 원칙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그 절차가 맞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피해와 혼란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부디 여권과 정부가 이런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을 꼭 인식했으면 한다.

모규엽 사회부 차장 hirt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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