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박카스 불매운동, 그 너머

국민일보

[한승주 칼럼] 박카스 불매운동, 그 너머

입력 2021-03-24 04:20

여성을 잘 뽑지도 않고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주며
승진을 잘 시키지 않는 나라

양성평등은 중요한 투자기준
여성 위한 '착한' 결정 아니라
투자받기 위한 '똑똑한' 결정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폭로
일회성 논란에 그쳐선 안 돼
차별 막는 강제성 있는 법 필요

‘거대 로펌에서 전문가를 채용할 때도 기혼임을 확인하더니 출산 계획을 묻더라. 로스쿨에서 교수 채용 면접을 하면서 지방 가게 되면 남편이 뭐라 안 하느냐, 그럼 어떻게 할 건가라고 묻더라.’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여성 변호사인 후배는 ‘나와 지인도 면접 때 이런 일을 겪었다’며 SNS에 글을 올렸다. ‘여성은 군대 안 갔다 왔으니 월급 덜 받아도 되겠느냐’는 동아제약의 성차별 면접 폭로가 나온 후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경험담이 끝도 없이 나오고 있다. 대형 게임업체 면접에선 여성인권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사상검증까지 이뤄졌다고 한다.

동아제약 면접자가 군대 질문을 받은 날은 지난해 11월 16일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 꼭 읽어야 할 책 100’에 선정된 날이었다. 해외에서 이 책을 호평하며 권하고 있을 때 정작 한국의 김지영들은 면접장의 병풍이 되거나 대놓고 차별하는 질문을 받으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세계여성의 날 즈음에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가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수준, 임원 진출 등을 수치화해 산정한다. 한국은 올해도 조사 대상 OECD 29개국 중 29위다. 9년 연속 꼴찌라는 점이 더 놀랍다. 남녀 임금 차이도 가장 크다. 여성을 잘 뽑지 않고,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주며, 승진을 잘 시키지 않는 나라. 2021년 대한민국이다.

최근 기업 경영에 있어 가장 주목받는 투자지표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다. 미국과 유럽 등에선 ESG를 실천하지 않는 기업은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국민연금도 ESG를 투자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중 사회(S) 분야의 중요한 이슈가 양성평등이다. 양성평등 움직임은 여성 인권을 위한 ‘착한’ 결정이 아니다. 투자 받기 유리하기 때문에 실천하는 ‘똑똑한’ 결정이다. 여성 인력이 남성과 균등한 비율이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기업이 중장기적으로 경영 성과가 높게 나온다는 해외 연구는 많다. 남녀 100%의 인력 풀에서 인재를 뽑는 회사와 50%인 남성 중심으로 인재를 개발하는 회사가 있다고 하자. 어떤 기업이 더 좋은 인재를 뽑을 가능성이 클까. 인력 풀을 100%로 넓힌 회사일 것이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얘기다. 그 기업이 소비자를 응대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소비자는 남녀 반반이지만 소비 선택권의 80%가 여성에게 있다고 한다. 주요 결정을 할 수 있는 임원이나 이사회 멤버에 여성이 있어야 소비자의 마음을 읽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내년 8월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모든 상장사는 여성 사외이사를 무조건 한 명이상 뽑도록 자본시장법이 개정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양성 측면에서 주요 의사결정 기구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으로 이 문제가 환기된 건 우리에게 좋은 기회다. 독일 폭스바겐은 2015년 디젤 승용차 배출가스 조작으로 주가가 폭락하는 경험을 했다. 이를 계기로 환경문제와 사회공헌 활동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후에 폭스바겐 임원은 “돌이켜보면 그때 이 사건이 터진 게 축복이었다. 이를 교훈 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 면접 차별 문제 역시 그냥 흘려보낼 일이 아니다. 정부도 움직이고는 있다. 고용노동부가 기업 인사 담당자 교육 등을 통한 성차별 면접 방지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구속력이 없다. 아예 면접 때 성차별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실효성과 강제성 있는 법 제정이 필요해 보인다.

대통령 선거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양성평등은 다음 대선에 주요 이슈가 될 것이다.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 특히 미래를 견인할 젊은 여성들의 표심은 이에 크게 좌우될 것이 틀림없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외롭게 눈물을 훔쳤던 ‘젊은 김지영들’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동아제약 면접자가 지핀 불씨가 일회성 논란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동아제약 박카스 불매운동, 그 너머가 중요하다. 기업이, 사회가, 정부가 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김지영들은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고, 투표로 이를 드러낼 것이다. 시간은 밀레니얼 세대인 이들의 편이다. 어느 당이 먼저 이 어젠다를 선점할 것인가, 어느 기업이 먼저 양성평등을 내세울 것인가. 빠른 쪽이 이길 것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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