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오픈런’ 들여다보기

국민일보

[세상만사] ‘오픈런’ 들여다보기

문수정 산업부 차장

입력 2021-04-30 04:08

‘오픈런’. 끝나는 시점을 정해놓지 않고 계속 공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오픈 시간 전부터 매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개점하자마자 매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많이 쓰인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오픈런이 이렇게 쓰였는지, 누가 먼저 이런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샤넬과 종종 함께 쓰인다는 점이다. 오픈런의 연관검색어도 샤넬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5월, 샤넬이 일부 제품의 가격을 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즈음 몇 날 며칠 이른 아침부터 백화점에 인파가 몰렸다. 그리고 굳게 닫힌 셔터 앞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백화점 오픈 직후 샤넬 매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 장면이 인상적으로 각인되면서 오픈런은 샤넬과 나란히 등장하곤 한다.

오픈런은 다양하게 응용된다. 스마트폰 오픈런, 돈가스 오픈런, 딸기케이크 오픈런, 플레이모빌 오픈런…. 구하기 힘들거나 인기가 많은 어떤 것 뒤에 오픈런을 붙이면 공통된 풍경을 그려낼 수 있다. 오픈 시간 전부터 질서 있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픈런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새치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초침이 ‘째깍’하고 개점 시간 정각에 도착한 순간,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매장을 향해 질주하는 광경은 오히려 드물다. 문밖에서부터 지켜왔던 순서는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지켜진다. 매장을 향해 뒤엉켜 달려가는 대신 기존의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 됐다. 인내의 시간을 함께하며 만들어진 일종의 동지 의식, 더 오래 기다린 사람에 대한 존중이 그 질서를 뒷받침해준다.

‘차례는 반드시 모두가 지키는 것’이라는 오픈런의 불문율은 정보기술(IT)의 수혜도 입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들답게 매장의 태블릿PC에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면 스마트폰으로 대기번호를 받을 수 있다. 컴퓨터는 융통성이 없다. 어떤 사유로든 새치기가 불가능해진다. 스마트 대기번호만 있으면 굳이 매장 앞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현된다. IT 적용이 어려운 환경에선 아날로그 방식이 동원된다. 전통의 ‘종이 번호표’다. 오픈런 동참자들이 의기투합해 번호표를 직접 만들어 나누기도 한다. 암묵적으로 지켜온 차례가 문서화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그들은 나름의 체계와 질서와 공감대를 공유하며, 초조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픈런에 대한 취재 감상을 다시금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열망이 뜨겁게 흐르지만 절제를 잃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는 질서정연한 행렬’. 몇 차례 취재를 해보니 오픈런에 뛰어든 이들은 뜻밖에도 ‘행복해했다’. 그 정서를 온전히 공감은 못해도, 현장에서 감도는 기대감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때론 피곤하고 때론 짜증나지만 목적이 분명한 그 일의 종국에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한다. 정가보다 비싸게 판매하는 리셀러들, 수수료를 받고 오픈런을 대신해주는 구매대행업자들이 시장 질서를 흐리고 선의의 피해자를 만든다는 지적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1년에 2~3번씩 가격을 올리도록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고도 한다. 샤넬을 사기 위해서든, 틈새시장을 공략해 돈을 벌기 위해서든 ‘좋아서’ 뛰어든 이들에게 이런 비판이 썩 와 닿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현장에서 만난 어느 취재원의 말이 맴돈다. “이것도 경험이고 추억이죠. 너무 해석하지 말아주세요.”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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