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땅끝

국민일보

[빛과 소금] 땅끝

서윤경 종교부 차장

입력 2021-09-25 04:02

미국 버몬트대학의 로버트 고든 인류학과 교수는 저서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에서 사회학자 에릭 코헨의 여행자 분류법을 소개한다. 코헨은 여행자를 조직화된 대중여행객과 독자적인 대중여행객, 탐험가 그리고 방랑자로 나눈다.

조직화된 대중여행객은 친숙한 걸 선호하고 고급 호텔에 묵으며 정리된 장소만 다닌다. 독자적인 대중여행객은 친숙한 걸 고수하지만 저렴한 숙소에 묵고 관광 코스만 다니지만 개별적으로 다닌다. 탐험가는 참신함과 친숙함을 버무린 여행 방식을 택하며, 현지 문화 탐구에 나서지만 언제든 친숙한 곳으로 돌아올 출구 전략을 갖춘 여행객이다. 마지막이 방랑자다. 관광 코스를 피해 현지인과 섞이기를 좋아한다.

꽤 오래전 독자적 여행객으로 유럽을 여행하던 중 찾은 곳이 있다. 포르투갈 호카곶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땅끝이자 망망대해의 시작점이라는 여행 서적의 설명에 이끌려 찾았다. 그곳에 세워진 십자가 탑엔 포르투갈의 대시인이라 불리는 카몽이스의 시가 쓰여 있다. “여기… 육지가 끝나는 곳, 그리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경험한 ‘땅끝’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자적 여행객에게 매력적인 여행지라는 인상을 남긴 ‘땅끝’이란 단어는 선교사들을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됐다. 선교사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품고 땅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지인들의 삶 속에 들어갔다. 그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사랑을 실천했다.

선교사가 여행자라면 그들은 코헨이 말한 분류법에서 방랑자에 가깝다. 다른 게 있다면 선교사들의 여행지인 땅끝은 지리적·지정학적 개념의 장소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하나님 말씀이 닿지 않는 곳이 땅끝이고, 그곳이 여행지가 됐다. 그러니 여행객 입장에서 선교사에게 “당신이 있는 땅끝은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예상과 다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쿠바에서 오랜 세월 사역한 한 선교사에게 여행지 쿠바의 매력을 물었다. 낭만적인 답을 기대했더니 물가는 고공 행진이라 빵 하나 사기 버겁고, 낭만이 넘치는 해안가에는 여행객과 부랑자가 공존한다고 답한다. 휴양지부터 생각나는 태국, 태양의 나라로 알려진 페루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의 눈에 매력적으로만 보이던 현지인들의 삶에서 선교사들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봤고 이는 사역으로 이어졌다. 멀리서 볼 때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군부 쿠데타로 어느 때보다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의 강도가 높아진 미얀마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치솟으면서 외교 행랑을 통해 산소발생기를 받아야 했던 인도에서도, 강력한 지진으로 건물과 도로가 파괴된 아이티에서도 선교사들이 끝까지 현장을 지켰다. 땅끝에 머물던 방랑자에서 아예 현지인이 됐다.

이는 월 1회 국민일보에 게재하는 ‘선교, 잇다’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기획 취지는 간단하다.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만화가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선교사 판으로 구성하자는 게 목표였다. 기도로 후원해 달라는 선교사 요청에 막연함을 느낀다던 성도들을 위해 선교사가 본 그 나라 이야기를 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선교사가 어떤 나라에서 무슨 사역을 하는지 알면서도 정작 그들이 왜 그곳을 사역지로 선택했고, 현장에서 진행하는 사역이 그 지역에 왜 필요한지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제 3회째 나간 ‘선교, 잇다’가 한국교회, 성도와 선교사의 땅끝을 이어줬으면 한다. 그리고 선교사라면 호카곶 십자가 탑에 썼을 만한 시로 마무리해 본다.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복음이 닿지 않은 땅끝을 찾아가는 곳.”

서윤경 종교부 차장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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