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소유냐 더 많은 소유냐?”

국민일보

[바이블시론] “소유냐 더 많은 소유냐?”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교수)

입력 2021-10-15 04:08

1970년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몇 년 뒤 한국에도 번역본이 출간돼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소유와 존재를 대립항으로 해서 과연 20세기 후반을 사는 인간의 본질적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물었던 문제작이었다. 한 신학자는 소유와 존재는 대립항이 아니고, 소유는 존재에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소유와 존재 간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근대에 자본주의가 대두된 이래 줄곧 지속력과 회복력을 보여 왔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외부 비판 세력인 공산주의는 2세대를 갓 넘긴 뒤 실험을 그치고 말았다. 여전히 공식적인 공산국가가 있지만, 적어도 옛 소련과 동유럽의 경우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캐서린 베더리의 책에는 심지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가장 길고도 고통스러운 경로”라는 말까지 나온다.

자본주의는 이토록 강고한 이데올로기이기에, 내부 비판 세력에 기대를 걸기도 했고, 사실 다양한 주장이 나왔다. 최근인 21세기 초만 해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원용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표현까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최신 자본주의 버전인 신자유주의의 질주에 효과적으로 제동이 걸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인간의 본성 특히 성악설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본성과 가장 높은 적합성을 보이고,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자본주의는 아마도 당분간 자본주의 안팎에서 자본주의에 견줄 만한 강력한 비판 세력을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오히려 21세기 인류는 바야흐로 소유냐 존재냐의 선택을 넘어 소유냐 더 많은 소유냐의 보다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는 이런 상황을 악화하는 다양한 사건이 진영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수년 전부터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회자된 적이 있다. 어느 사회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게 마련이지만, 자기 나라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아예 떠나버리고 싶다는 처절한 심경을 토로한 심각한 단어다. 그런데 요즘 그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걸 보면 그 단어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지경인가 보다.

인간의 삶이란 게 제한된 자원과의 싸움인지라 그것을 원하는 욕망도 있고, 모두가 그 욕망을 채울 수 없기에 적절하게 조정하는 통제도 있다. 통제는 사회적으로는 법질서를 통해 사회를 합법적으로 이끄는 도덕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성찰을 통해 개인을 인도주의적으로 이끄는 윤리가 있다. 전자를 위한 대표적 주체가 정치라면 후자를 위한 대표적 주체는 종교다. 그런데 두말할 것 없이 오늘날 한국인은 정치 범람 속에서 정치 부재를 경험한다. 홍수 속의 갈증이라고 할까? 뿐만 아니라 종교 범람 속에서 종교 부재도 경험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무소유가 범인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고상하다면 ‘주는 복’을 깨닫고 가르치면 어떨까? 내 편에서 주는 것은 상대편에서는 받는 것 곧 소유케 되는 것인 셈이다. 그러면 ‘소유냐 존재냐’ ‘소유냐 더 많은 소유냐’의 틀을 벗어난 ‘소유냐 소유케 하느냐’라는 대안적 틀이 가능할까? 한편으로 욕망을 더 큰 욕망으로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 절망의 일상화를 경험하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논외로 한다 해도 과연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회사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