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문화스케치] 여름이 다 갔네

국민일보

[오은의 문화스케치] 여름이 다 갔네

입력 2021-10-23 04:03

“걷기 좋은 날씨네.” 누군가가 말했다. “뛰기 좋은 날씨 같은데?”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카페 안에 앉아 있었다. 걸으려는 의지도, 뛰려는 계획도 당장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날이 좋다는 것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걷거나 뛰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날이었다. 그날 오후, 한파특보를 접하고 좀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하루 만에 10도 이상 기온이 내려간다니 믿을 수 없었다. 예보일 뿐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문득 올려다본 하늘빛이 심상치 않았다.

“여름이 다 갔네.” 집에 돌아오는 길, 몸을 움츠리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말을 들었다. 어릴 때 들었던 말 중 유독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저 말도 그중 하나였다. 아마도 말에서 풍기는 어떤 뉘앙스가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말끝에는 늘 어떤 지긋지긋함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이 다 갔다는 안타까움도, 겨울이 다 갔다는 안도감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여름이 다 갔을 때만 표현될 수 있는 해묵은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저 말을 늘 품고 있었던 나는 예전에 ‘갔다 온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시 속에는 오랜만에 재회한 과거의 연인이 등장한다. 여름은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일 수도 있고, 으레 호시절이라 부르는 어떤 시기일지도 모른다. 시에 등장하는 “긴 팔을 아무리 걷어도 반팔이 되지는 않아”라는 구절처럼, 한 번 헤어졌던 사람들이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설령 다시 사랑한다 하더라도 조금은 변화한 두 사람이 만나는 셈이다. “반팔을 입고 갔다가 긴 팔을 입고 온 사람처럼” 묵묵히 시차를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한파특보가 발령된 다음 날에는 서울 여의도에서 팟캐스트 녹음이 있었다. 그날 찾아온 손님은 부산에 사는 유진목 시인이었다. 본인이 연출한 영화 촬영을 마친 뒤 스튜디오를 찾은 터라 짐이 많았다. 녹음을 마치고 함께 택시를 탔다. 서울역에 내려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따라 내릴까 하다가 기왕 택시를 탔으니 사는 동네까지 가 달라고 말씀드렸다. 퇴근 시간대라 차가 많이 막혔다. “제가 탈 때는 오후였는데, 저녁을 지나 어느새 밤이 되었네요.” 기사님이 멋쩍은 듯 웃으셨다. “하루아침에 여름에서 겨울이 됐잖아요.”

택시에서 내리니 바람이 찼다. 한파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 ‘비거스렁이’가 떠올랐다. 외투를 여미고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뛰어볼까?’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뛰고 있었다. 다리를 가로지르고 골목을 달렸다. 아무리 떠올려보려 애써도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박일 때를 제외하고 최근에 뛴 적은 없었다. 실은 지난 몇 년 동안 뛰는 일을,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잊고 지낸 것 같았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헉헉거리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내가 열심히 뛸 때 심장도 덩달아 뛰고 있었을 것이다. 걷기 좋은 날씨도, 뛰기 좋은 날씨도 아니었으나 나는 걷고 뛰었다. 마치 여름이 다 갔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겨보겠다는 듯이.

정지돈은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문학동네, 2021)에서 관광객이 넘쳐 나는 프랑스 파리 뷔트쇼몽에 다녀온 후 이렇게 쓴다. “공원의 풍경만 아니면 딱히 파리라고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맘에 안 들었냐면… 그렇진 않다.” 한파 속 길을 걷고 뛰던 내 심정도 비슷하다. 기대가 무너졌을 때, 눈앞에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예상 밖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그 풍경에서 걷기 시작하면 된다. 내친김에 뛸 수도 있을 것이다.

‘갔다 온 사람’이라는 시는 얼마 전 ‘여름이 다 갔네’라는 제목의 노래가 돼 세상에 나왔다. 노래를 만들고 부른 윤덕원은 어제 보내온 편지에 이렇게 썼다. “항상 망설이는 나에게 너는 망설임 없이 말을 걸고 다가오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사람이다.” 옷걸이에는 아직 반팔이 즐비한데, 가을을 비켜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계절이 변화할 때마다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이유를 생각한다.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계절에 망설임이란 없다.

오은 시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