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더 즐겨야 했다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더 즐겨야 했다

윤소정 패션마케터

입력 2021-11-29 04:07

지식 섭취를 즐겼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시험공부는 즐길 수 없었지만 역사나 사회, 생물같이 세상을 이해하는 재미가 있는 수업은 만화 가게에 앉아있는 것처럼 재밌었다. 만화 읽는 것도 좋아해서 시험이 끝나면 주로 심각한 만화책 몇 권을 빌려 종일 굴러다니며 읽는 게 선물이었다. 소설책을 좋아하게 된 건 좀 더 뒤의 일로 조금 읽다 포기하는 걸 한동안 반복하다 집중되지 않는 초반부 40장 견디기를 훈련한 후 즐길 수 있게 됐다.

벤처 열풍에 휩쓸려 정신없던 시기를 보내다 30대 중반 무렵 지식 탐닉에 다시 한번 깊이 빠졌었다. 투입 없이 생산만 해내다 보니 자연스레 생긴 욕구였다. 처음엔 다소 닥치는 대로 책을 사고 그중 반은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 버려두었지만 차츰 그 안에서 맥락을 찾아가며 지식을 넓혀갔다. 그러다 우리 문화와 공공 정책에 관해 심각한 궁금증이 생겼는데 물어볼 데가 없어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학교를 찾아 아무 연고 없던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경력관리를 위해서라기보다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벌였던 일이라 엉뚱한 공부에 시간을 버렸다는 비난과 유학비로 오피스텔을 하나 장만했어야 했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내가 좋아 한 일이었지만 이후로 한참 동안 쓸 데가 없고 말 상대가 없으니 어느 순간 흥미를 잃었다. 책을 사는 일도 돈을 버리는 일로 여겨지고 하루하루 할 일이 밀려들며 취미로 하던 지식 섭취는 그만뒀다.

요즘 나를 찾는 사람과 기회가 갑자기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관심 두지 않은 공부를 했던 덕에 그리고 그 주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불러 조언을 구한다. 나 혼자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게 증명된 것 같아 일단 반갑고 최대한 도움이 되고 싶다. 하지만 벌써 충분히 넓고 깊은 공부를 해두지 못한 한계를 느끼고 있다. 쓸데가 있건 없건 남들이 들어주건 말건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고민하고 알아뒀어야 했다.

윤소정 패션마케터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