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18) 후쿠시마 원전 사고, 부실한 사후 대처에 피해 눈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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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장순흥 (18) 후쿠시마 원전 사고, 부실한 사후 대처에 피해 눈덩이

숨기기에 급급 정보 공유 않고 눈치만
사고 매뉴얼도 없어 대피 과정 큰 혼란
반면교사 삼아 안전 위해 더 노력해야

입력 2021-11-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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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2012년 2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조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때 다카하시 다카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장과 함께했다.

2009년 12월 UAE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운영권을 따낸 원전 수주는 대한민국 원자력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원전 수주 이후 UAE와 건설 국방 방산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이뤘고 중동과 새로운 협력 분야가 생겼다.

2011년 3월 11일 UAE 원전 기공식에 참석하려고 인천공항을 떠날 때였다. “긴급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는 컸다. 후쿠시마에 있던 원자력발전소가 손상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나는 한국원자력학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해 말 5명으로 구성된 후쿠시마 원전사고 조사위원회 국제자문단의 자문위원으로 선임됐다. 리처드 메저브 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장과 앙드레 클라우드 라코스테 프랑스 원자력안전규제당국 의장, 라스 에릭 홈 국제방사선방호위원(ICRP) 전 위원장, 차 쿼한 중국 환경부 수석 엔지니어였다.

이듬해 2월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조사위원회에 참석하면서 자꾸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뭔가를 숨기려 하는구나.’ 후쿠시마 1호기는 쓰나미로 인한 디젤 발전기 침수 몇 시간 후에, 2,3호기의 경우에는 2~3일 후에 중대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그걸 사고 발생 후 3개월 뒤 중대 사고라고 공식 인정했다.

회의 중에도 다들 조용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했다. 이렇게 정보 공유를 안 하고 쉬쉬하는 분위기는 자국민에게 불안감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나아가 타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일본에 대한 불신만 커지게 했다.

알고 보니 일본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모든 전원이 상실되는 사고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 사고 초기 방사선 검출 측정에 실패했고 정부와 기관 사이에 비효율적 정보 전달로 측정 데이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주민 대피 과정에서 혼란이 컸다. 일본 정부는 ICRP의 비상 대피 권고 기준을 보수적으로 잡았다. 그리고 이 기준에 따라 주민 11만명을 대피시켰다.

문제는 이 지역이 시골이라 대부분 노인이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많은 인원이 대피하다 보니 이동 중 심리적 스트레스나 지병 때문에 몇 분이 돌아가셨다. 방사선 피해로 돌아가신 분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뒤늦게 대피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방사선 때문에 신체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 정부가 대피 기준으로 잡은 방사능 피폭량(20mSv/년) 기준 역시 인체 영향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보수적인 기준이었다. 실제로는 옥내 대피 권고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방사성 물질이 많은 사고 초기에 밖으로 대피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사고가 진정된 후 대피하는 것이 노인 사망자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현장을 보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천재지변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대비를 소홀히 하고 사후 대처가 부실해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것은 전형적인 인재다. 각국의 원자력 종사자는 원자력발전소의 절대 안전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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