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6) 집 팔아 교회 빚 갚고 여덟 식구 예배당 지하서 생활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김경래 (6) 집 팔아 교회 빚 갚고 여덟 식구 예배당 지하서 생활

입력 2014-01-24 02:31
  • 미션라이프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기사사진


나는 부산에서 한상동 목사가 개척한 삼일교회에 출석했다. 1953년 상경한 뒤엔 가족들과 흥천교회에 다녔다. 명신익(1916∼1968) 흥천교회 목사는 젊은 시절 주먹 쓰던 사람이었다. 평양구치소에서 신사참배 반대 혐의로 수감된 주기철 목사를 만나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분이었다. 명 목사는 61년 새 예배당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채를 쓴 것 같다. 새 예배당에서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마칠 시간이 되면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졌다.

“빨리 돈 내놓으시오.” “우리한테 빌린 돈 챙겨갑니다!”

매주 한 무리의 남녀가 헌금 주머니를 열어 돈을 셌다. 그 돈을 센 뒤 몽땅 털어갔다. 사채업자들이었다. “주일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나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경건해야 할 예배가 돈 때문에 엉망이 돼버렸다. 나는 마음의 벽에 부딪혔다. ‘하나님, 이걸 어찌 해야 됩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기로 했다.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럽시다”라고 했다. 우리가 살던 청운동 2층 집을 동네 복덕방에 내놨다. 하루 만에 집이 바로 팔렸다. 집값으로 받은 돈은 300만원이었다. 교회 빚은 270만원이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에 35원, 커피 한 잔 30원하던 때였다. 그 돈을 들고 명 목사를 찾아갔다. 손사래 치며 거절했다.

“꼭 받아주십시오. 대신 우리 가족이 집을 구할 때까지 예배당 지하를 쓰도록 해주세요.” 명 목사는 간곡한 내 요청을 이기지 못해 돈을 받았다. 당시 나는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 자녀도 다섯이나 됐다. 우리의 교회 더부살이는 2년 가까이 이어졌다. 명절이면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선물로 사과 상자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 북창동 23번지.’ 내 문패를 찾을 수 없었다. 교회 주소였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 사이에 ‘경향신문 정치부장이 교회 지하에 산다’는 얘기가 한참 회자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대한항공 직원이라고 소개한 이가 나에게 연락했다. 영락교회 집사라고 했다. “저희 회사가 미국 뉴욕에 취항하면서 제가 지점장으로 가게 됐어요. 회현동 저희 집이 팔릴 때까지 머무시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우리 자녀는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어났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당에 분수가 있는 집 2층 주택이었다. 건평만 250㎡가 넘었다. 이사 온 지 10개월쯤 지났을 때 집이 팔렸다. 600만원이었다. 집 주인에게 매매 대금을 송금했다. 당시는 외환송금 절차가 까다로웠다. 한꺼번에 돈을 보내기 어려웠다. 150만원을 송금했을 무렵이다. 주인이 연락해 왔다.

“더 이상 송금하지 말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쓰세요.” 너무 큰 돈이라 내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제가 어려울 때 교회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자리를 잡아 그 돈이 아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한 집사님에게 주님이 주시는 상급으로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집을 팔아 교회 헌금한 돈이 270만원. 그로부터 3년 뒤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주어진 돈이 450만원. 나는 그때 깨달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상식으로 예측할 수가 없구나.’ 나는 교계 일을 할 때나 세상 일을 할 때 내 부족한 지혜로 계산하기에 앞서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먼저 헤아리게 됐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