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운전자의 비이성적 성향 도로의 익명성에서 나온다

[책과 길] 운전자의 비이성적 성향 도로의 익명성에서 나온다

입력 2009-10-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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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톰 밴더빌트/김영사

인터넷에 악플이 많은 이유를 분석할 때 가장 유용한 이론은 익명성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철저히 은폐되기 때문에 아무런 제약 없이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을 하는 것이나 자동차 운전을 하는 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운전도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사용할 때 아이디로만 자신을 드러내듯, 운전할 때는 차종, 번호판만 노출할 뿐 자신을 감출 수 있다. 온라인 공간과 도로는 모두 공평한 조건으로 익명성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끼어들기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차선을 빠져나가려고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을 보고도 누군가는 얌체처럼 꼭 맨 앞으로 가서 끼어든다. 만약 직장 내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슬그머니 앞으로 새치기를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혼내주려고 과격하게 그 차를 다시 앞지르거나, 어리버리한 초보운전자를 향해 경적을 연달아 눌러대는 행동도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행동이다.

같은 사람이 운전자일 때와 보행자일 때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상대를 비난하고, 각 상황에서 그런 행동이 정당하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심리·과학 저널리스트인 톰 밴더빌트는 운전이 단순히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운전을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운전은 뇌수술 전문 외과 의사를 빼면 가장 복잡한 일이다. 운전은 무려 1500개 이상의 작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2피트마다 분석해야할 새로운 정보가 하나씩 나타난다. 1시간에 30마일을 간다면 그동안 분석해야할 정보는 1320개로 분당 440개의 단어에 해당한다. 현재의 과학기술이 만든 로봇은 이처럼 방대한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운전에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운전을 하면서 스쳐지나가는 여러 가지 상황을 천천히 살펴보고 이를 사회학, 심리학적으로 풀어낸다.

출퇴근 시간에 뻔히 차가 막히는 걸 알고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차를 끌고 나오는 건 1시간 정도는 통근에 할애할 수 있다는 심리적인 결정이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케사레 마르체타는 자동차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일하러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연구했는데, 놀랍게도 1시간이었다. 이동하려는 욕구와 집에서 머물러 있으려는 욕구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이 1시간이라는 분석이다. 오늘날 아프리카 시골이든, 뉴욕이든 매일 통근 시간은 1.1시간이다.

흔히 남성들은 여성 운전자 때문에 도로 정체가 더 심해진다고 불평을 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통행량 증가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운전 기술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른 시간에 바로 직장으로 향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일명 ‘서비스 운전’을 많이 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시장을 보는 등 부수적인 움직임이 많아 도로에 머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낯설고 어려운 길에서 사고가 더 많이 날 것 같은 기분은 맞는 것일까? 저자는 신호등이 없는 로터리가 신호등이 있는 일반 교차로보다 안전하다고 강조한다. 교차로는 신호도 봐야하고 다른 차들의 움직임도 주시해야 한다. 신호가 바뀔까봐 조급해지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의 50%는 교차로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익숙한 길은 오히려 위험하다. 심리학자들은 운전을 ‘과잉 학습 행동’이라고 부르는데 일단 기술을 익히면 다음부터는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고가 발생한 차선뿐만 아니라 건너편 방향 차선까지 차량 수용 능력이 12.7% 떨어진다는 결과를 제시한다. 이유는 구경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구경하는 걸 놓치기 싫어하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경제학자 토머스 셀링은 이때 운전자당 보통 10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한다.

차량 정체의 해법으로 도로 증설을 생각하는 것도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도로가 늘어나는 만큼 교통량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국 인간적으로 운전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교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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