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혈을 지나'의 작곡가 김도훈 목사의 삶을 들여다봤더니

국민일보

'보혈을 지나'의 작곡가 김도훈 목사의 삶을 들여다봤더니

입력 2010-02-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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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보혈을 지나’ 누가 이 찬양을 만들었을까. 작곡자 이름을 보니 최근 ‘외톨이야’ 표절시비로 이목을 집중시킨 김도훈 작곡가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찬양사역자로 동명이인이었다.

그의 찬양에선 오래된 성경책에서 풍기는 향기가 난다. 색이 바래 누렇다 못해 사각거리기까지 하는 달콤한 냄새다. 멜로디와 가사만 들어도 ‘아, 이 찬양’하며 절로 따라 부른다. ‘주가 거기 계심으로’ ‘주를 향한 그리움’ ‘성령님, 인정합니다’ 등 무려 450여곡을 만들었다. 60세까지 1000곡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시작으로 온 세상에 찬양의 선율로 도배하고 싶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보혈의 사랑을 이토록 애절하게 표현한 것을 보면 최소한 50대는 넘겠지 했다. 예상은 한참이나 빗나갔다. 아직 마흔도 채 안 된 청년 목회자였다.

김도훈(37) 목사. 무엇이 이 젊은 목사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을까. 그는 1973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모래위에 반석을 세운 해에 태어났다. 당시 서울의 큰 법랑회사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백혈병을 앓고부터 집안은 기울었다. 가장이 2년간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어린 남매와 여린 아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김 목사의 어머니는 건축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어린 남매를 키웠다. 아들은 어머니의 월급봉투를 훔쳐 오락실과 도박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아버지 부재에 대한 반항이었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을 폭력으로 괴롭혔다. 대학생이 된 다음에 알았지만 동생은 ‘오빠를 죽게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다고 했다.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했다.

질풍노도의 10대를 지켜준 것은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겨우 철이 들었단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학교에서다. 당시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바위처럼 굳은 마음을 모래알같이 곱게 만들었다고 했다. 육신의 아버지 보다 더 사랑이 많은 영혼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뒤늦은 공부에 집중해, 91년 대학(건국대 충주캠퍼스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신입생 환영회 때 만난 한 여학생의 질문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날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끝까지 거부하는 모습을 본 이 여학생의 질문은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말해 줄 수 있나요.”

그 때는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으로 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2년이 흘러갔다. 교회 찬양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피아노 건반을 익히면서 찬양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앙생활도 신실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동생을 사랑하게 됐다는 점이다. 아니 동생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대학생 도훈에게 세상적인 학문을 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다.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 94년 한세대 신학부에 들어갔다. “졸업하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졸업식에 입고 갈 양복이 없었지요.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요즘은 졸업식에 안가는 학생들도 많기 때문에 굳이 양복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대화를 엿들은 여동생이 오빠를 끌다시피 해 유명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여동생은 어제 봐놓은 양복을 달라고 하더니 오빠에게 입어보라고 했다. 옷값은 한 달 월급과 맞먹는 액수였다. 싫다고 뿌리쳤지만 동생은 오빠를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김 목사는 이 양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늘나라로 갈 때 입기위해서다.

찬양곡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98년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올 크리스마스 당신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를 묻는 기도를 드렸더니 대답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직접 만든 노래를 듣고 싶다’였다는 것이다.

콩나물 머리도 잘 볼 줄 모르는 데 어떻게 작곡을 할지 큰 낭패였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기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소형 녹음기가 떠올랐다. 당장 오디오 가게로 달려가 녹음기를 샀다. 그리고 2년 동안 어디를 가나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육성으로 작곡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던 날 버스 안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바울성전의 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 때 주머니에 있던 녹음기를 꺼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 합니다…” 8마디가 전부였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홀로 촛불을 켜고 통기타를 잡고 예수님께 드리는 생일 축하 찬양을 불렀다.

‘보혈을 지나’는 전도사가 된 2003년에 만들었다. 기도하던 중 환상이 보였다고 했다. 커다란 십자가를 주변 하늘에서 주먹만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물방울이 아니었다. 핏방울이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다가 폭포처럼 흘렀다. 수많은 영혼들이 폭포수를 지나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압선을 건드려 감전이 된 것같이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줬다고 했다.

김 목사에게 2004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김 목사 어머니는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3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교회에 다닌 후로 한번도 쉬지 않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봉투, 200만원이 든 은행통장과 네잎크로바를 붙인 400개의 청첩장이다.

30여 년간 도배하는 일로 엄지손가락이 휘어져 못쓰게 된 어머니가 일을 잠시 쉴 때였다고 했다. 결혼을 4개월 앞둔 토요일 오후 어느 더운 여름날.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 목사의 어머니는 집 근처 서울 용마산 공원 잔디밭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네잎크로바였다. 눈이 밝은 사람도 보기 어려운 잎을 무려 400개나 모았다고 했다. 책갈피마다 잎크로바가 껴있었다. 그렇게 말린 네잎크로바를 어머니는 아들 결혼식 청첩장에 붙여 지인들을 초청했다.

불우한 청소년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십자가 사랑이었다. 예수를 향한 열정과 순종이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큰 위로였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와는 일찍이 이별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지고지순한 신앙심이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순종을 따라 믿음의 아들이 됐다. 25일 오후엔 김포공항에서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한다. 도쿄순복음교회(한상인 목사) 청년부 담당 선교사로 사역하기 위해서다.

떠나기 전날 25일 오후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 십자가 탑 아래서 김 목사를 만났다. 스포츠형 머리칼에 부스를 발랐다. 앳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내 마음 속엔 빨간 십자가가 있어요. 죄와 고통으로 가득했던 청소년기를 이겨내고 순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로지 보혈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꿈을 물었더니 ‘천천천’이라고 했다. 60세가 될 때까지 1000곡을 만들고, 1000장의 워십 음반을 내며 죽기 전에 1000일 동안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일본어 교재를 놓지 않았다. 한 달 전 선교사로 부름 받고 시작한 공부다. 1년 후엔 일본어로 설교할 생각이라고 했다. 10년 후 모습을 묻자 ‘온 지구가 성전이 되도록 기도하고 찬양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존귀한 주 보혈이 내영을 새롭게 하시네/존귀한 주 보혈이 내영을 새롭게 하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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