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배우의 힘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옥선희] 배우의 힘

입력 2010-06-2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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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가 좋으면 영화의 반은 성공한 거라고들 한다. 작가론은 영화를 감독의 역량과 철학에 좌우되는 예술로 본다. 편집이야말로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요소라며, 장면 이어붙이기를 분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이와 평자의 입장과는 달리 관객 대부분은 배우에 끌려 극장을 찾는다. 나 역시 아름다운 배우에 빠져 영화 여정에 나섰고, 배우의 매력과 연기력으로 인해 영화를 오래,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내 영화 수첩의 첫 장은 그레타 가르보가 차지하고 있다. 평민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도도하고 차갑고 고독한 여왕으로 ‘신성 가르보 제국’을 이끌었던, 영화 역사상 최고의 스타. ‘육체와 악마’ ‘안나 카레니나’ ‘크리스티나 여왕’ ‘춘희’에서 ‘니노치카’까지, 그레타 가르보는 라이벌로 거론되던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마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먼 나라 스웨덴 출신이며, 전성기에 은퇴해 은둔한 점도 신비를 더해주었다. 친구들에게 “돈 많이 벌어 그레타 가르보 만나러 갈 거야”라고 큰소리쳤었는데. 1990년, 그가 세상을 떠났단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평생을 두고 흘릴 눈물을 이때 다 쏟아냈다.

사춘기의 나를 사로잡은 또 한 명의 스타는 율 브리너다. ‘여로’에서, 사랑해선 안 되는 여인 데보라 카를 밤새 기다리며 보드카를 들이붓다, 술잔을 손으로 으깨던 고독한 러시아 장교. 짝사랑한 여인을 탈출시키고 총성에 스러진 그는 내게 “남자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표상이 되었다.

상대방을 꿰뚫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눈빛과 당당한 걸음걸이, 얼마나 용모에 자신 있으면 머리까지 다 밀어버렸을까. ‘십계’의 모세 역을 위해 찰턴 헤스톤은 5개월간 헬스클럽에서 몸을 만들었지만, 람세스 2세로 분한 율 브리너는 운동이나 다이어트를 전혀 안한, 타고난 멋진 몸매로 당당하게 연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양은 가득히’를 본 다음날, 완벽한 미모의 알랭 들롱과는 거리가 먼 영어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는 영어를 작파하고 불어를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로코와 그 형제들’ ‘태양은 외로워’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등 그의 출연작을 모았고, 그때 모은 비디오는 비디오 기기가 없는 지금도 진열장 가장 위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세대는 외로운 승냥이 같았던 미남 스타 알랭 들롱을 모른다.

왕년의 스타를 보고 있노라면 요즘 영화팬이 참 안되어 보인다. 이웃집 아줌마 용모로도 배우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그것을 나쁘다 할 순 없지만, 배우는 모름지기 첨단 성형 수술로도 따라갈 수 없는 천상의 미모와 카리스마로 압도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흑백영화시대 스타 분위기를 갖춘 배우는 김혜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좋은 시나리오, 감독, 편집자를 만나 미모와 연기력을 활짝, 오래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