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청년이여] “세계는 청년의 무대” 선언, 신세계 조성 격려

국민일보

[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청년이여] “세계는 청년의 무대” 선언, 신세계 조성 격려

입력 2012-03-0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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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논설, 월간 ‘청년’ 1926년 연재)

‘청년이여’는 이상재(1850∼1927)가 월간잡지 ‘청년’에 1926년 2월부터 12월까지 연재한 논설인데, 국한문체에 세로쓰기로 되어있다. 이 논설은 “세계는 청년의 무대”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며, 청년의 임무를 혁명이라고 밝힌다. 장차 “혁명을 하려면 그 책임이 청년에게 있지 아니한가…세계적 혁명의 기운을 순응하며 이를 실행코자 할진대 각 개인이 자기의 혁심(革心)을 선행하여야 완전한 성공을 거둘 것이다.”

또한, 언행을 새롭게 하고 사조를 혁신하여 신세계를 조성하라고 주장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한 요한계시록 21장을 일독하라고 권한 바 있다. 나아가, 제국주의를 겨냥하여 “만일 자기 민족만 주장하고 타민족을 힘으로 억압하든지 싸워 약탈하든지 하면 이는 하나님이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크신 은총을 무시하여 진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저자인 월남 이상재는 1850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고, 31세 때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신진문물을 접했다. 그리고 우정국 주사, 주미 공사관 서기관, 학무국장 등을 거쳤다. 1894년 학무국장 재직시엔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초·중학교, 외국어학교 등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학부 참서관과 외국어학교 교장, 내각 총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1902년 탐관오리의 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국가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 속에서 한글 신약성경과 종교서적들을 탐독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고종 황제의 요청으로 의정부 참찬을 맡았고, 1906년 이준, 이상설 등의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막후에서 준비하였다.

1908년 선교사 게일과 언더우드의 권고를 받아들여 YMCA 교육부장에 취임, 청년지도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정열을 바쳤다.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조직확대에 힘을 쏟아, 1914년 전국에 산재한 YMCA와 재일본조선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했다. 이 연합회는 이후 삼일운동의 발판이 되었고, 이상재는 민족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조선일보로부터 사장 추대 제의를 받고 거듭 고사하다가 1924년 취임했는데, 그가 내건 수락 조건은 “동아일보와 경쟁하지 않고 민족계몽에 합심해서 나서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동아일보에서도 감복했다고 한다. 이상재는 1927년 2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단일전선인 신간회가 조직되면서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같은 해 3월 2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청년운동가답게 70대에도 젊은이들과 즐겨 장난치고 놀았다. 이를 본 어느 친구가 “청년들 버릇이 나빠질 것”이라고 나무라자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하면 청년이 청년 구실을 바로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평생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면서도 항시 특유의 유머를 뿌리고 다녔다. 그 유머는 또한 불의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일례로, 그는 어느 연회 석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완용과 송병준을 노려보고 농담을 던졌다. “대감들이 어서 도쿄로 이사를 갔으면 좋겠소. 대감들은 무엇을 망하게 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도쿄로 가시면 이제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니오.”이때 이완용과 송병준은 웃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부길만 교수 (동원대 광고편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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