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왕의 목을 자르고 청교도 국가세운 올리버 크롬웰 (上)

[크리스천 인문학] 왕의 목을 자르고 청교도 국가세운 올리버 크롬웰 (上)

입력 2012-05-0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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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을…” 유럽 왕실 발칵 뒤집은 찰스Ⅰ세 처형, 그 힘은 크롬웰이었다

전대미문이었다. 재판을 통해 신민들이 그들의 군주를 처형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영국 왕 찰스 1세의 처형은 1649년 1월 30일, 뱅크위딩 하우스 앞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집행관은 찰스 1세의 목을 향해 도끼를 내려쳤다. 그리고 아직도 피를 뿜는 찰스 1세의 목을 집어올려 군중들에게 내보였다. 앞서 메리 스튜어트도 사형에 처해졌으나, 그녀는 자국민들이 아닌 영국 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처형 소식에 전 유럽의 왕실은 경악했다.

영국 왕 찰스 1세는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처형을 당한 것인가? 의회는 처형을 앞두고 재판을 열었다. 왕은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적법한 왕인 자신의 권한은 무한하며, 어떠한 권력도 자신을 심판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의회파가 장악한 고등법원은 “영국 왕은 국가의 법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에 따라 제한된 권력만 행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고등법원은 왕의 죄상에 대해 세 번이나 답변을 요청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모두 거부했다. 고등법원은 재판을 연지 10일 만에 판결을 내렸다. 사형! 죄목은 반역과 모반이었다. 재판은 내려졌지만, 왕을 처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두 한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유럽 왕실의 강력한 복수를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의 처형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처형이 이렇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믿는 한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찰스 1세와의 몇 차례 싸움을 모두 승리로 이끈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었다. 그는 고등법원의 배심원으로 참여해 찰스 1세의 처형에 찬성하는 서명을 세 번째로 했다. 그는 왕이 죽어야 종교로 인한 내전이 종말을 고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청교도 국가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찰스 1세가 꾀한 반역과 모반은 무엇인가? 찰스 1세는 병사한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1625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청교도들을 탄압했다. 1633년 월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해 종교의식을 중시하는 고교회(High Church) 정책을 폈다. 고교회 정책은 영국 국교회 내에서 가톨릭 유산을 강조하며, 프로테스탄트적인 예배에 반대해 주교의 권위와 가톨릭 전통의 예배의식을 옹호하는 신앙의 입장을 대변한다.

대주교 로드는 가톨릭 교회가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이자 보편적인 공교회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교회에 로마 가톨릭의 예배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다시 제단을 설치하고 십자가, 그리스도의 수난상, 파이프 오르간 등을 도입했다. 국민들은 고교회 정책에 저항했다. 그러나 대주교 로드는 찰스 1세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죽이거나 귀를 자르는 등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벌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장로교회를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를 채택하고, 공동기도서에 따라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의 반장로교 정책에 반발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스코틀랜드를 진압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는 당연 전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전비를 충당하기 위한 세금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의회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1628년에 그는 스페인 등과의 대외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의회는 찰스 1세에게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하지 말 것, 정당한 이유 없이 구금하지 말 것, 백성들의 집이나 소유지에 병사를 숙영시키지 말 것, 그리고 평화 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말 것 등의 ‘권리청원’을 요구했었다. 찰스 1세는 이 청원에 정식으로 동의했지만,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그로서는 이행하기 힘든 요구였다. 그는 차라리 의회 없는 전제정치를 선택했다. 의회를 해산한 후 그는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찰스 1세는 첫 번째 스코틀랜드 출정에 나섰다가 패배했다. 이제 제2차 출정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그는 의회를 소집해 필요한 세금 동의만 얻고 해산해 버릴 셈이었다. 의회는 1640년 4월3일에 열렸다. 그러나 의회가 개원하자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박세라고 알려진 문제가 많은 왕실의 징세를 비롯해 지난 10년의 치세에 대한 수많은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징세 반대를 넘어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분위기였다. 이에 찰스 1세는 5월5일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3주간 열렸던 이 의회를 영국 역사에서는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라고 부른다.

찰스 1세는 다시 의회 없는 전제정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다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두 번째 원정을 떠난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군대에 의해 대패한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해 11월7일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렇게 해서 열린 의회는 1653년에 가서야 폐회가 된다. 이 의회를 영국 역사에서는 ‘단기의회’와 구분하여 ‘장기의회(Long Parliament)’라 부른다.

장기의회에는 더욱 많은 청교도인들이 진출했다. 의회는 찰스 1세의 바람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들은 ‘국왕 독재’의 상징이던 특별재판소를 폐지했다. 또한 왕이 다시 의회 문을 닫지 못하게 ‘의회는 최소한 3년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는 규칙을 제정했다. 그들은 왕의 측근인 대주교 윌리엄 로드를 체포해 런던탑에 감금하고 아일랜드 총독 출신인 스트래퍼드 백작을 처형했다. 스트래퍼드 백작이 처형된 후 1641년에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가톨릭 교도들이 수천 명의 프로테스탄트 주민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회는 이에 격분했다. 그 사이 찰스 1세는 교황청과 손을 잡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반란자들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의회는 국왕의 재가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아일랜드에 진압군을 파병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1641년 11월22일 의회는 즉위 이후 찰스 1세의 실정을 200개 조항에 걸쳐 낱낱이 밝힌 ‘삼가 시정을 요구한다’는 뜻의 ‘대간의서(Grand Remonstrance)’를 159대148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찰스 1세는 결의문 통과를 주도한 상원의원 1명과 하원의원 5명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아예 4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직접 의사당으로 체포하러 나섰다. 그러나 의원들은 의사당을 빠져나가 런던 시내에 몸을 숨겼다. 그 사이에 주권은 국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는 이념이 불거지면서 왕과 의회는 점점 양립할 수 없어졌다. 왕은 의회 해산을 명령했으나 의회 지도자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이에 맞서 찰스 1세는 노팅엄으로 갔고, 거기서 국왕 상비군을 조직했다. 가톨릭 교도인 왕비는 군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러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이제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내전으로 치달았다. 왕당파는 영국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영국 남부는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내전 초기에는 찰스 1세의 군대가 요크셔와 남서부 등지에서 승승장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실전 경험이 없었고 그나마도 지역방위군 성격이 짙어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찰스의 군대는 1643년 게인즈버러 전투와 1644년 마스턴모어 전투에서 한 사람이 이끄는 새로운 형태의 군대에 의해 계속 패배했다. 그 사람은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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