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람으로서 4·3사건 부채감 있었죠…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의 오멸 감독

국민일보

제주 사람으로서 4·3사건 부채감 있었죠…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의 오멸 감독

입력 2013-03-2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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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일대의 4개 스크린에서 지난 1일 개봉한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는 20일까지 1만5000여명의 관객을 모았다. 순제작비 1억원을 들여 제주 4·3사건의 아픈 상처를 다룬 저예산 독립영화가 제주에서만 거둔 성적으로 대단한 흥행이다. 그 여세를 몰아 21일 서울 25개관을 포함해 80여개 전국 상영관에서 개봉한다. 제주발 ‘지슬’ 북풍이 전국 극장가를 강타할 수 있을까.

18일 저녁 서울 CGV압구정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마지막 시사회가 열렸다. 무대인사에 나선 오멸(42) 감독은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소감을 밝혔다. “드디어 서울에 상륙했습니다. 제주 4·3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심각한 영화가 아니고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무대인사 후 만난 오 감독은 그동안 겪은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 감회에 젖었다. “제주에서 1만명을 동원한 건 대한민국 전체로 봤을 때 100만명만큼이나 대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변방이라 일컬어지는 제주에서 이뤄낸 영화적 사건이죠. 우리가 목표로 삼은 전국 3만 관객은 4·3사건 희생자들의 울음이자 외침을 세상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에요.”

제주 출신인 오 감독은 제주대 미술학과를 다닌 화가 지망생이었다. 붓과 종이를 살 돈이 없어 친구의 화구로 밤새 그림을 그렸다. 졸업 이후 극단 자파리연구소를 세워 연극에 몰두했다. 2011년 ‘오돌또기’로 서울어린이연극상 4관왕을 차지했다. 그런 중에 틈틈이 영화도 찍었다. 2009년부터 4편의 장·단편을 연출한 그는 5번째 작품 ‘지슬’로 올해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영화는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피해 산속 동굴로 대피한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4·3사건을 소재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6·25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역사 정리가 안 돼 있어 제주 사람으로서 갖는 부채감이 마음 한쪽에 있었어요. 그 시대의 사람들을 밀착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이데올로기나 분노보다는 화해와 치유를 담으려 했지요.”

‘지슬’은 감자의 제주어다. 오 감독은 “원래 제목은 돼지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꿀꿀꿀’이었다”며 “영화를 재미있게 찍으려고 흑돼지 ‘복순이’를 섭외했는데, 스케줄이 잘 안 맞아 돼지 신이 많이 빠지고 결국은 주민들의 피난 식량인 감자 신 위주로 영화가 남게 됐다”고 소개했다. 감자는 전 세계적으로 굶주릴 때, 어려운 시대를 지탱하게 해준 ‘소울 푸드(soul food)’라는 것이다.

‘끝나지 않은 세월 2’라는 부제에 대해서는 “4·3사건을 담은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을 찍다 2005년 뇌출혈로 숨진 김경률 감독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대표 감독은 박찬욱 봉준호 김기덕 같은 분이잖아요. 그분들은 상위 1%에 속하고 나머지 99%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뚝심과 열정으로 영화를 만들지요. 이런 99%를 대변하는 사람이 김 감독이에요.”

배우 강수연이 상영관 한 개를 통째로 예약하고 각계 인사들이 영화 관람 캠페인을 벌이는 등 ‘지슬’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에 대해 오 감독은 “눈물나도록 고맙고 감격스런 일”이라며 “4월 말까지 상영되는 영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전국 개봉 직후 새 시나리오를 쓸 계획”이라며 “이젠 좀 조용하게 차기작을 준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시사회에 참가한 관객들은 마을을 불사르고 학살을 자행하는 토벌대의 만행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동굴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 주고받는 순박한 농담에 웃음 짓기도 했다. 시대의 아픔을 유머로 치환한 작품에 대한 감동과 여운 때문일까. 예술사진보다 더 아름답게 촬영한 제주의 자연을 뒤로 하고 영화가 끝나자 일부 관객들은 한참 동안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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