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 알렌, 현대 한국의 여명

국민일보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 알렌, 현대 한국의 여명

입력 2014-02-07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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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21년 헌신, 한국 근대화 초석으로

올해로 꼭 130년을 맞이한 한국선교 역사의 첫날에 알렌 선교사가 등장한다. 한국 최초의 서양 선교사로 건너와 21년간 이 땅을 섬겼던 그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역사신학자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알렌의 일대기와 함께 한국, 한국선교 130년의 여정과 의미를 되짚어본다.

첫 서양선교사 알렌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그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도착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선교사다.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리고 1905년 6월 9일 그의 나이 47세 때 한국을 떠나 미국 토레도시에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만 21년을 머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황금기는 한국에서 보낸 21년이었다. 그 외 여생은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역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외교 사역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세상에 왔다가 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미 관계의 시작

광화문 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나는 그 건너편에 알렌의 동상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변함없이 갖고 있다. 알렌의 공헌이 근대 한국사에서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근대 한국의 역사를 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효시다. 미국과는 조약이 있기 16년 전부터 여러 차례 교섭이 있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을 때 불에 탄 상선이 미국 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여러 차례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수호조약이 있던 해에 한불조약, 한영조약, 한독조약 등이 잇따라 맺어지면서 한국은 세계의 일원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앞서 일본과는 6년 전인 1876년 2월에 굴욕적인 수교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해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일본공사관을 한국군이 습격하고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은 민비가 변장을 하고 충주로 피난을 가는 난리가 일어나 앞이 캄캄하던 때였다. 얼마 후 일본은 우리 조정을 위협, 제물포조약을 통해 배상금 등으로 당시로선 거액인 55만원을 보상받았다. 실로 국가의 운명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때였다.

미국의 북경공관과 서울공사관이 ‘동격’

그런데 미국은 우리 한국에 꿈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1883년 정월 한미수호조약이 비준되자 첫 주한공사로 푸트를 임명했다. 그런데 그 주한공사관의 위격이 북경의 미국공사관 위격과 같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처럼 보이던 청나라 북경이 미국에서는 한국 서울과 동격으로 취급된 것이다. 이것은 천지개벽과 같은 변이었다. ‘청국과 한국이 같다!’ 이것을 1883년 정월에 미국이 해낸 것이다. 그렇게 인정해 준 것이 미국이다.

그뿐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파견한 보빙사 민영익 일행이 귀국할 때에 미국 해군의 거대군함 트렌턴호에 태워 인천까지 보내주었다. 미국정부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서 보였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묘하게 계속된다. 전통이 된다.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한다.

알렌의 거대한 역할

알렌은 한국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또 조정과 가까워지면서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할 수 있도록 돕는 ‘입국통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한국에서 안련(安連)이라 불렸는데 묘하다. 선교사들 입국의 길을 ‘안전하게 연결시켜 주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정과 아주 친근하게 지내게 되고, 고종을 도와 한국이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입국한 지 6년 만에 미국 외교관으로 신분을 바꾼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국가 신분을 잃어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한국을 위해 근대화 사역과 반일 친한의 강경책을 밀고나가는 데 앞장선다.

알렌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 초창기부터 우리 곁을 지켰다. 우리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더러는 동료 선교사들의 핀잔을 사기도 하고, 더러는 본국 정부와 갈등과 불신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관된 헌신을 보여줬다.

그는 실로 근대화 한국의 대문을 열고, 파란만장한 격동기에 세계적 안목으로 우리 편에 서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던, 우리 근대역사의 개척자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그의 동상이 한국을 구해낸 이순신의 동상 건너 쪽에 서 있는들 무엇이 이상하랴. 그의 공헌이 드높이 기념되고, 우리들도 근대한국의 시련기에 칠전팔기하며 비상하던 모습을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알렌 선교사는=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의 후손으로 출생했다. 웨슬리언대 신학부와 마이애미대 의대를 졸업한 뒤 25세 때인 1883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됐다. 이듬해 9월 20일 한국땅을 처음 밟은 그는 1905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제중원 및 세브란스 병원 설립 등 의료선교사 및 외교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2년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민경배 교수는=1934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연희대(현 연세대), 영국 에버딘대, 런던대, 장로회신학대를 졸업했다. 서울장신대 총장, 중앙대학원대 초대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기독교회사,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한국교회 역사와 신앙 등이 있다.

<민경배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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