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체정이 될 사나이

역체정이 될 사나이

2021 LCK 스프링 시즌, LCK 어워즈 투표

입력 2021-03-31 01:42 수정 2021-03-31 02:30
담원 기아 제공

2000년대 초반 농구 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갓 데뷔해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그를 후원했던 스포츠용품사 나이키는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를 넣었다. ‘We are all witnesses.(우리 모두가 목격자다.)’

e스포츠 기사에 굳이 다른 종목 이야기를 끌고 온 것은, 2021년의 LCK 팬들이 2000년대 초반의 NBA 팬들과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어서다. 우리는 전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캐니언’ 김건부가 역체정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29일부터 30일까지 2021 LCK 스프링 시즌의 ‘LCK 어워즈’ 투표가 진행됐다. 국민일보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정기 취재매체 권한으로 1표를 행사했다. 5개 포지션의 올-LCK 팀과 최우수선수(MVP)를 뽑았다. 각각 어떤 이유로 표를 줬는지 이 기사를 통해 밝힌다.

탑라이너 올-LCK 팀
담원 기아 제공

1위: 담원 기아 ‘칸’ 김동하
2위: DRX ‘킹겐’ 황성훈
3위: 젠지 ‘라스칼’ 김광희
4위: 아프리카 ‘기인’ 김기인
5위: KT ‘도란’ 최현준

탑라이너 1위 표를 김동하에게 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김동하는 FPX로 떠난 전임자 ‘너구리’ 장하권의 빈자리를 잘 채웠다. 나르로 상징되는 탑라인 메타 변화에 10개 팀 탑라이너 중 가장 노련하게 대처했다. 상대의 탑라인 집중 공략에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2위 표를 놓고 황성훈과 김광희 중에 고민했다. 황성훈이 더 꾸준했다고 판단해 2위로 선정했다. 그가 김광희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진 채로 시즌을 치러야 했다는 점에도 가산점을 줬다. 황성훈의 제이스는 유독 해머가 무거워 보였다. 원 코인이나 마찬가지니 그럴 만했다.

3명의 선수를 놓고도 고민했다. 김기인과 최현준, 리브 샌박 ‘써밋’ 박우태였다. 세 선수는 소속 팀의 팬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팀의 성적도 6승12패 또는 5승13패로 비슷했다. 김기인과 박우태는 라인전에서 강점을 보였다. 반대로 최현준은 한타에서 강점을 발휘했다. KT의 6승 중 2~3승은 최현준이 한타로 가져왔다고 봐 고심 끝에 이처럼 투표했다.

기자는 소속 팀의 성적보다 선수 개개인의 선전에 초점을 맞췄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한화생명 ‘모건’ 박기태, T1 ‘칸나’ 김창동과 ‘제우스’ 최우제, 농심 ‘리치’ 이재원이 정규 리그 동안 김기인, 최현준, 박우태보다 꾸준하게,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가? 기자는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정글러 올-LCK 팀
라이엇 게임즈 제공

1위: 담원 기아 ‘캐니언’ 김건부
2위: DRX ‘표식’ 홍창현
3위: 아프리카 ‘드레드’ 이진혁
4위: 농심 ‘피넛’ 한왕호
5위: 젠지 ‘클리드’ 김태민

올 시즌도 김건부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니달리, 그레이브즈, 헤카림, 우디르…. 챔피언을 가리지 않았다. 담원 기아는 김건부를 위해 많은 밴픽과 게임 내 자원을 투자했고 그 결과 16승2패, 정규 리그 1위 완주란 큰 보상을 누렸다.

홍창현은 2라운드 막바지에 팀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1라운드부터 2라운드 중반까지 꾸준히, 김건부 다음으로 좋은 플레이를 했다는 데 큰 점수를 줬다. 그도 황성훈과 마찬가지로 경쟁자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 많은 부담을 지고서 경기에 나서야 했다.

이진혁, 한왕호, 김태민의 순위는 투표자가 어떤 부분에 가중치를 두는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기자는 25분 동안만이라도 아프리카가 게임을 이길 수 있게 해준 정글러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매겼다. 아프리카가 꼴찌 싸움을 하게 된 데에 대한 이진혁의 책임은 없었다. 그런데 꼴찌를 면한 건 이진혁의 공이 컸다.

미드라이너 올-LCK 팀

1위: 한화생명 ‘쵸비’ 정지훈
2위: 담원 기아 ‘쇼메이커’ 허수
3위: 젠지 ‘비디디’ 곽보성
4위: 리브 샌박 ‘페이트’ 유수혁
5위: T1 ‘페이커’ 이상혁

미드라이너 투표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한 게 미드라이너 1위 표였다. 2라운드 중반부터 고심을 거듭한 끝에 정지훈을 골랐다. 정규 리그 전체를 되돌아봤을 때 정지훈이 허수보다 조금 더 꾸준했다고 판단했다. 팀에서 맡은 역할이 더 크다는 것도 고려했다.

사실 정지훈과 허수를 놓고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건 실력의 우열이 아닌 플레이스타일 선호도의 문제다. 두 선수의 플레이는 조금 결이 다르다. 허수는 미드라이너의 답안지다. 수많은 양산형의 꼭대기에 있는 오리지널이다. 기자가 꿈꾸는 미드라이너로서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를 한다.

정지훈은 그와 연관된 키워드 ‘구도 비틀기’에서도 볼 수 있듯 정도(正道)가 아닌 길을 걷는다. 그러나 수많은 정파의 고수들과 비교했을 때도 어느 하나 모자란 부분이 없다. 그래서 기자는 두 선수의 성장과 경쟁을 지켜보는 게 웬만한 무협지 읽기보다 즐겁다. 다음 시즌에도 고르기가 어렵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미드라이너 올-프로 팀 투표를 기다릴 것이다.

곽보성에게 3위 표를 주는 게 이번 투표에서 가장 미안한 일이었다. 그는 LCK를 제외한 전 세계 어느 리그에서든 퍼스트 팀으로 뽑혔을 것이다. 그는 젠지에서 가장 꾸준하게 잘했다. 물이 오른 2라운드부터는 라인전 최강자로 군림했다. 미드 1차 포탑과 포탑 사이에 섰을 때 그는 허수와 정지훈을 포함한 10개 팀 미드라이너 중 가장 강했다.

4, 5위 표의 대상으로는 유수혁과 이상혁, ‘클로저’ 이주현, ‘솔카’ 송수형 등을 고려했다. 전반적인 활약을 봤을 땐 이상혁이 가장 준수했다. 특히 팀의 막판 연승 행진 때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안정성 측면에서 경쟁자들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꾸준히 경기에 출전해 팀의 추락을 막거나, 성적 반등을 이끄는 점도 중요하게 평가했다. 그래서 23세트에 나선 이상혁보다 40세트에 나선 유수혁에게 힘을 실었다. 유수혁은 이상혁만큼은 아니었지만, 4위 표를 받기에 모자람 없을 정도로 잘했다. 그는 리브 샌박이 2라운드 막바지까지 플레이오프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원거리 딜러 올-LCK 팀
한화생명e스포츠 SNS 갈무리

1위: 한화생명 ‘데프트’ 김혁규
2위: 담원 기아 ‘고스트’ 장용준
3위: 젠지 ‘룰러’ 박재혁
4위: T1 ‘테디’ 박진성
5위: 농심 ‘덕담’ 서대길

김혁규, 장용준, 박재혁, 박진성 모두 1위로 뽑힐 만한 근거가 있는 시즌을 보냈다. 김혁규가 정규 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T1전에서 완패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위 표를 준 건 그가 시즌 내내 가장 신뢰할 만한 활약을 했다고 봐서다. 팀의 리더 역할을 수행하며 안정적인 라인전, 집중력 있는 한타 플레이로 정지훈과 함께 팀의 체급을 높였단 점에도 주목했다.

장용준은 1라운드 초반과 2라운드 막판에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고작 그 몇 경기를 제외하고는 퍼스트 팀으로 꼽혀도 이상하지 않을 시즌을 보냈다. 박재혁은 지난 시즌보단 얌전했는데, 개인 기량보단 팀 전략에 따른 변화로 봤다. 박진성은 이상혁과 마찬가지로 적은 출전 경기 수(20세트) 때문에 4위로 뽑았다.

서대길과 ‘바오’ 정현우, ‘헤나’ 박증환을 놓고 짧은 고민을 하고서 서대길에게 5위 표를 줬다. 서대길은 다른 두 선수보다 라인전에서 더 좋은 플레이를 했다. 킬을 몰아 먹으면 한타에서 먹은 값을 했다. 원거리 딜러가 킬 값을 못하면 플레이오프에 갈 수 없는 시즌이었다.

서포터 올-LCK 팀
T1 SNS 갈무리

1위: T1 ‘케리아’ 류민석
2위: 담원 기아 ‘베릴’ 조건희
3위: 한화생명 ‘뷔스타’ 오효성
4위: 젠지 ‘라이프’ 김정민
5위: 농심 ‘켈린’ 김형규

류민석과 조건희 중 누가 더 나은 시즌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조건희의 캐리력과 류민석의 꾸준함을 놓고 비교하다 류민석을 골랐다. 조건희가 종종 라인전에서 흔들렸단 점이 마음에 걸렸다. T1은 원거리 딜러로 누가 나오든지 간에 ‘바텀 라인전이 세다’는 평을 들었다. 류민석의 공이 크다고 봤다.

물론 조건희도 오래 회자될 만한 시즌을 보냈다. 라인전에서 흔들린 경기보다 상대가 정신 못 차릴 만큼 흔들어댄 경기가 더 많았다. 한타에서의 집중력은 압도적이었다. 8분경 협곡의 전령 둥지 앞에서 그와 마주쳤다가 죽은 선수가 한 트럭이었다. 이상하게 5레벨인데도 상대 팀의 6레벨 선수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오효성과 김정민을 놓고 오래 고민하다가 오효성을 위에 놨다. 그가 과감하게 전투를 열었던 장면들이 뇌리에 남았다. 김정민은 젠지가 흔들리던 때 그 또한 기량이 저하됐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라운드 중순부터 쓰레쉬를 잘 다루는 모습을 보고 다시 높은 평가를 하게 됐다. 김형규는 라인전에서 선전을 펼친 것에 점수를 줬다.

정규 시즌 MVP
담원 기아 제공

1위: 담원 기아 ‘캐니언’ 김건부
2위: 한화생명 ‘쵸비’ 정지훈
3위: 담원 기아 ‘쇼메이커’ 허수
4위: 젠지 ‘비디디’ 곽보성
5위: T1 ‘케리아’ 류민석

LoL e스포츠의 선수 생명은 짧다. 1년 새 한 선수에 대한 평가가 급락하거나, 급등하거나, 급락했다 급등하거나 한다. 그래서 선수의 미래를 예측하는 건 가급적 피한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신에 가득 차서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벵기’ 배성웅처럼 계산하고 ‘닝’ 가오 전닝처럼 들이박는 이 선수는 역사상 최고의 정글러가 될 것이다.

설령 담원 기아가 이번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조기 탈락하더라도 기자는 이 얘기를 철회하지 않겠다. 김건부가 앞으로 몇 개의 우승 트로피를 더 드는지에 따라 역체정 타이틀을 얻는 시기가 앞당겨지느냐, 멀어지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결국 왕좌에 오를 것이다.

미드라이너 올-LCK 팀 투표 때와 마찬가지로 정지훈, 허수, 곽보성에게 같은 배점의 표를 줄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세 선수는 팀을 각각 정규 리그 1~3위로 이끌었으며 시즌 내내 꾸준했다. 아울러 미드라이너 3인방을 제외하면 류민석만큼 리그 내에서 영향력을 과시한 선수가 없다고 봤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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