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될지 몰라서… 현경씨, 아빠 신고 못한 속마음[이슈&탐사]

국민일보

어떻게 될지 몰라서… 현경씨, 아빠 신고 못한 속마음[이슈&탐사]

[미완의 해방일지] 2화. 기회

입력 2022-10-23 00:02 수정 2022-10-23 00:02
친족성폭력의 몇몇 극단적 사례를 다루는 언론 보도는 대체로 피해자의 ‘인생’에는 무심합니다. 주로 수사보고서나 판결문을 인용하다 보니 범죄사실, 그러니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단편적으로 전하는 데 그칩니다. 이런 접근은 자칫 자극적 보도로 흐르고 가해자에 대한 단발성 비난으로 끝납니다. 그 일이 피해자의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그들이 신고와 사건 처리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건과 통계에 가려진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여름 두 달여에 걸쳐 중·고등학생부터 딸을 키우는 50대 여성까지 17명의 생존자(살아남은 피해자)를 전국에서 만났습니다. 그중 10명이 현재 보호시설에서 살고 있는 10대, 퇴소한 지 얼마 안 된 20대입니다. 200자 원고지 3400장에 담긴 취재 기록은 저마다 삶을 일으켜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이들의 해방일지였습니다. 그 일부를 5회에 걸쳐 전합니다. 이 보도로 지금 피해를 당하고 있거나 잠재적 위기 상황에 놓인 아이들,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되려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감시망과 안전망이 강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삽화=전진이 기자


“○○○씨 딸 되시죠? 부친이 병원에 계신데 와서 한번 보셔야 될 거 같아요. 임종이 얼마 안 남았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동사무소 직원이 전해왔다. 간호실습 중이던 현경(가명·21)씨는 머뭇거리다 언니에게 알렸다. 실습을 마치고 오니 전화가 왔다. 언니는 울면서 “너도 빨리 와서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한 짓을 생각하면 도무지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곧 죽는다는데 가보기는 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엄마샘’과 상의 끝에 함께 가보기로 했다. 현경씨는 중학생 때부터 경남의 특별지원보호시설에서 살았다. 거기선 담당선생님을 엄마샘이라고 불렀다.

병실 앞까지 갔지만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는 더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었는데도 무서워서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언니가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재촉했지만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얼굴까지 보긴 싫었다. 현경씨는 먼 발치에서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다리만 바라보다 문 앞을 떠났다.

그는 다음날 죽었다. “지금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주검이 된 그의 얼굴이나마 마지못해 보게 됐다. 비쩍 말라 있었다. 커다란 덩치로 눈 시퍼렇게 뜨고 때릴 적 모습은 어디 갔는지. 동사무소 도움으로 화장을 했다. 집에 와 방문을 닫고 그를 생각하니 울음이 터졌다. 엄청 울었다. 지난 7월 경남에서 만난 현경씨는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눈물의 의미를 설명하기 어려워했다.

그때 신고할 걸

현경씨는 2살 때부터 언니와 함께 보육원에서 컸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아빠가 현경씨 자매를 데리러 왔다. 재혼한 엄마는 죽었다고 들었다. 현경씨는 종종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놀러 다니거나 집에서 다같이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이제야 그런 걸 해볼 수 있겠구나 기대했지만 ‘행복한 집’은 막상 다가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였다. 아빠는 딸들을 방치했고 온갖 이유로 때렸다. 그는 “엄마가 없어 관리하기 힘들다”며 딸들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다. 학교에서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든 말든이었다. 성(性)적으로도 손을 댔다. 어린 딸이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 딸들과 나란히 앉아 TV를 볼 때 손을 뻗어 몸을 만졌다. 그러다 몹쓸 짓까지 시켰다. 구타든 성폭행이든 갈수록 심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멍자국을 보고 눈치를 챘다.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현경씨는 “참는 데까지 참아보겠다”고 했다. 어렵게 되찾은 가족을 잃는 게 싫었다. 그러나 참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참는 만큼 더 오래, 더 많이 학대당할 뿐이었다. “그때 신고할 걸 너무 늦게 한 거 같아요. 조금이라도 빨리 안전해질 수 있었을 텐데.” 현경씨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자기 안전을 위해 용기 내서 신고했으면 좋겠다”며 “부모를 신고한다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 잘못으로 안 돌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별지원보호시설에 입소한 피해자들이 심리치료와 상담을 받는 공간. 이슈&탐사팀

두어 달을 더 버티다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이때까지도 폭행만 문제인 줄 알았다. 도우러 온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들을 만나서야 아빠의 스킨십이 성폭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담임선생님이 없었다면 참고 살지 않았을까요. 참다가 죽었을 수도 있고.” 그는 아픈 진담을 농담처럼 하며 웃었다.

현경씨는 단기보호시설을 거쳐 다른 지역에 있는 특별지원보호시설로 옮겨졌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물려받은 피를 다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빠가 혐오스러웠다. 친아빠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해보고도 싶었다. 남이라면 조금이나마 덜 고통스러웠을지 모른다. 그 나쁜 사람이 뭐라고 불쑥 생각나면 괴로웠고, 괴로우면 떨쳐내려고 제 몸에 상처를 냈다. 그 시절 몸부림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현경씨 팔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곧 출소했다. 찾아와 죽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길에서 지나가는 아저씨들만 봐도 아빠일 것 같아 도망쳤다. 한번은 언니가 전화로 “아빠가 너 보고 싶어하는데 오면 안 되겠냐”고 했다. 소름이 끼쳤다. 교도소에서 나온 아빠는 지적장애 3급인 언니가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다 가져갔다. 괴롭힘은 그가 죽고 나서야 끝났다.

뒤늦게 찾아온 엄마

혜래(가명·26)씨가 스무 살이 됐을 무렵 친엄마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너무 어릴 때 떠나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였다. 나는 절대 우리 엄마처럼은 안 살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래도 친엄마를 보긴 하네, 하는 마음으로 만났다. 엄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딸이 얼마나 험한 일을 겪었는지 몰랐다.

혜래씨는 아기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친척들 집을 전전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런 생활을 했다. 하도 옮겨 다녀서 몇 살에 어디서 누구랑 살았는지 헷갈릴 정도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아빠가 데리러 왔다. “나는 아빠 어딨어?”라고 물으면 어른들이 “죽었다”고 둘러대던 사람이었다. 그는 재혼한 상태였다. 아이는 없었다.

내게도 엄마 아빠가 생기는구나, 나도 부모랑 같이 사는구나 하며 기대를 했는데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아빠는 금세 폭군으로 변했다. 수시로 새엄마를 때리던 그는 어린 딸에게도 손찌검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턴 딸 몸을 함부로 만지기까지 했다. 새엄마는 자리를 피하거나 제 할 일만 했다. 그에겐 아이가 방패였다.

6학년 때 담임교사가 몸에 난 상처를 보고 몇 번이나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혜래씨는 응하지 못했다. 아빠가 거대한 벽처럼 떡 버티고 서 있어서 선생님이라도 구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신고하면 어떤 절차를 밟는지, 제대로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참다가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탈모까지 왔다. 중2였던 어느날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라고 확신했고 담임선생님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하루이틀 만에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들이 학교로 찾아왔다. 혜래씨는 곧장 보호시설로 옮겨졌다.

이런 삶을 엄마는 알 리 없었다. 필요할 때 없었던 그는 뒤늦게 찾아와 딸이라고 기대려 들었다. “나는 이제 내 갈 길을 가야 하는데 이제 와서 나한테 의지하는 게 가식적으로 느껴졌어요.” 혜래씨는 결국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런 일 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삽화=전진이 기자

현재 혜래씨는 유치원 교사로, 현경씨는 요양병원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 피난처이자 집이었던 시설에선 나이가 차서 나왔다. 시설에 딸린 자립관(자립지원 공동생활시설)을 거쳐 시설과 연계된 임대주택에서 각자 월세를 내며 지낸다. 시설에선 만 21살까지, 자립관에선 최대 4년을 살 수 있다(모든 시설이 자립관을 갖춘 건 아니다).

현경씨는 북적거리며 살다가 갑자기 혼자 지내게 되니 너무 외로웠다고 한다. 안 좋은 생각이 많아졌고, 그러다 혼자 울었다. 병원에서 숨을 거둔 노인들을 수습하는 날엔 자신을 괜한 죄책감으로 내모는 죽은 아빠가 떠올라 힘들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땐 병원에서 먹고 자며 일주일에도 예닐곱명씩 떠나보내야 했다.

나쁜 생각이 들면 떨쳐내려고 애쓴다. 방에선 음악을 크게 틀거나 TV를 켠다. 노래방에 가기도 한다. 양희은 김세정이 함께 부른 ‘엄마가 딸에게’를 좋아한다. 엄마한테 평생 들어보지 못한 말을 대신 듣는 것 같아서라고 그는 말했다.

시설에서 만난 친구와 언니 동생들, 모정으로 대해주는 엄마샘들은 아픔을 잊을 수 있게 해줬다. 고교생 때 자신과 시설 친구들의 아픔을 담은 극본을 써서 연극을 한 적이 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눈을 마주치면서, 그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힘을 얻었다. ‘어쩌면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현경씨는 이름을 바꿨다. 아빠 흔적을 모두 지우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부모 양쪽 성이 같아 성까지 바꾸지 못한 걸 그는 못내 아쉬워했다.

“어디 나가서 ‘부모 없이 큰 애치고는 잘 자랐다’ 이 소리 듣는 게 목표였는데 그것도 너무 남의 기준에 맞췄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때그때 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게 꿈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혜래씨의 팔뚝엔 ‘HAPPY’(행복)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참을수록 깊어지는 상처

친족성폭력은 가해자가 가족이라는 특성 때문에 아이나 제3자가 피해 사실을 알아채거나 신고하기 어렵다. 2010~2020년 경남의 특별지원보호시설에 입소한 79명은 평균 만 11.8세에 첫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시설 입소 당시 평균 연령은 15.9세였다. 4년이나 성학대를 당한 뒤에야 안전시설로 온 셈이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되도록 빨리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과연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의심, 앙갚음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부모를 신고한다는 죄책감. 이런 것들이 발목을 잡지만 신고를 늦출수록 안전해질 기회를 놓치고 상처만 깊어질 뿐이었다는 게 현경씨와 혜래씨의 공통된 경험담이다. 혜래씨는 “중2 때까지 참지 말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처음 물었을 때 그냥 바로 신고할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교육할 때 신고 후 조치 절차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줘야 적극적인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지은진 특별지원보호시설협회 대표는 “가족에 대해선 어떤 게 범죄인지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다”며 “가족 간에도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가정 내 학대로 고민하는 아동·청소년이나 이런 사례를 아는 분은 전화 1366(한국여성인권진흥원), 117(아동·여성·장애인 경찰지원센터), 02-2263-6464(한국여성의전화)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슈&탐사팀 강창욱 이동환 정진영 박장군 기자 issue@kmib.co.kr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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