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청결 강박 청소년

국민일보

[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청결 강박 청소년

강박사고와 싸우지 말라, 그냥 바라만 봐라

입력 2023-05-10 12:32

중학교 2학년 남학생 H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고 느끼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손을 너무 오래 자주 씻는다. 배변을 보면 옷을 모두 벗고 샤워를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더러운 것이 몸에 묻어 병에 걸릴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집 밖에서도 더러운 것을 만지면 걱정돼 수시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괜찮은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느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고 시간도 많이 낭비한다.

H와 같은 청결 강박증에는 행동 치료 즉 노출 요법이 가장 많이 쓰인다. 강박을 유발하는 상황 즉 ‘더러운 걸 만진 상황’에 노출하는데, 쉬운 것부터 단계적으로 높혀간다. 이때 느끼는 불안과 괴로움의 정도를 체크하면서 그 반응으로 유발되는 강박행동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강박사고에서 발견되는 불합리하게 왜곡된 사고(이걸 만졌으니 병에 걸릴 거야)를 논박하면서 교정하는 기법을 쓰는 인지 치료를 적용하면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런 인지 치료엔 한계가 있고 왜곡된 사고의 교정이 일시적이어서 재발이 잦다는 게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래서 노출 요법을 사용하되 사고(생각)에 대한 접근방법에선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왜곡된 사고를 억지로 교정하기보다는 생각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강박사고(이걸 만졌으니 병에 걸릴 거야)를 억제하고 통제하고 사고의 왜곡을 교정하면(이 정도 더러운 것을 만졌다고 병이 생기진 않아 우리 몸엔 면역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 강박사고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안 보려면 눈을 감으면 되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지 않으려면 귀를 막으면 되지만 내적 경험 즉, 감정, 생각, 신체적인 감각 등은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생각(강박사고)을 통제하려는 싸움은 줄다리기와 같아서 통제의 힘을 강하게 할수록 통제를 거스르려는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계속되는 줄다리기에서 빠져나오려면 줄을 내려놓는 것이 최선이다. 즉 떠오르는 강박사고와 싸우지 말고 그 생각을 거리를 둔 채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지나가는 기차를 보듯이 생각이 지나감을 보거나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 생각을 물체를 보듯이 그냥 본다. 이것도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강박사고가 나타날 때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이 생각에 낚이지 않을 수 있는 기술을 사용했는지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 적어 본다. 이런 식으로 생각에 거리 두는 기술을 익히도록 한다.

여기에 ‘가치’의 개념을 추가한다. ‘21세 생일에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나중에 생을 마치고 난 후 장례식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살아왔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어본다.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만약 지금 증상이 없는 상태라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있기를 원하는지 묻는다. ‘자신의 삶을 살 것인지, 증상과 싸우면서 인생을 보낼 건지’ 선택해 보게 한다.

지금 당장 증상으로 괴로운데 ‘가치’라니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야만 지금 힘든 생각과 불안과 싸우는 대신 줄다리기의 줄을 내려놓듯이 이를 받아들이고 힘든 감정, 감각에서 도망치지 않고 직면하는 노출 치료에 동기 부여가 된다.

병에 걸릴까 두렵긴 하지만 기꺼이 숙제하거나 운동하는 등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하면서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이와 함께 오는 성취감, 뿌듯함, 때로는 몰입감도 느껴보는 것이다. 이런 경험 자체가 또다시 내적인 동기를 불러일으킨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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