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티’ 엄성현 “우리는 동양에 ‘발리는’ 리그가 아니다”

‘엄티’ 엄성현 “우리는 동양에 ‘발리는’ 리그가 아니다”

입력 2024-05-15 22:49
라이엇 게임즈 제공

팀 리퀴드 ‘엄티’ 엄성현이 생애 첫 국제대회에서 아깝게 중반 탈락한 소감을 밝혔다. 처음으로 국제전을 경험해본 베테랑 정글러는 “국제대회에서 여러 지역의 팀들과 스크림·경기를 치른 덕에 시야가 넓어지고 많이 배웠다”면서 발전과 서머 시즌에서의 활약을 자신했다.

리퀴드는 15일(한국시간) 중국 쓰촨성 청두 파이낸셜 시티 공연 예술 센터에서 열린 2024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 브라켓 스테이지 패자 브라켓 경기에서 T1에 1대 3으로 패배, 대회 탈락이 확정됐다.

패배했음에도 박수 받을 만한 경기력이었다. 세트스코어는 1대 3이지만 리퀴드는 대회 우승 후보로까지 꼽히는 상대를 여러 번 핀치로 몰아넣는 등 ‘북미의 희망’이란 별명에 걸맞은 기량을 뽐냈다. 앞선 경기에서는 유럽의 강호 프나틱을 3대 0으로 제압하기도 했다.

다음은 T1전 직후 만난 엄성현과의 일문일답.

-방금 첫 국제대회 일정을 마무리했다.
“방금 마지막 경기를 마쳐서 그런지 당장은 ‘너무 아쉽다’는 생각만 든다. 2세트는 이겨야 하는 게임이었는데 ‘던져버렸다’. 4세트도 내가 캐리할 환경이 만들어졌는데 순간적인 의사소통 실수 때문에 뒤집혔다.”

-4세트 첫 드래곤 교전에서의 실수가 아쉬울 듯하다.
“드래곤을 잡는 과정이 제법 리스크 있었다. 사냥을 계속하려면 팀원을 끌어다 써야 했는데 다른 선수와 내 목소리가 맞물려서 팀원들에게 그 사실이 전파 안 됐다. 그러면 빠르게 사냥을 취소하고 둥지에서 빠져나가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4세트는 드래곤이 우리 승리 패턴의 핵심이었기에 아쉽다.”

-2세트 막판 한타에선 어떤 그림을 그렸나.
“2세트는 우리 조합의 이니시에이팅이 기관단총처럼 연속으로 총알을 쏘는 거였는데, 샷건처럼 한 번에 총알을 다 써버리는 한타를 많이 했다. 콜도 침착하게 하지 못해서 누군가가 슈퍼 플레이로 버티고 있는데 나머지가 버리고 가는 경우도 나왔다. 앞·뒷라인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내가 늑대 캠프에 숨었을 때가 가장 아쉽다. 게임 승패를 바꿀 클러치 플레이를 쓰레기 플레이로 바꿔버렸다. 내가 앞라인과 소통을 잘했다면 그때 노틸러스보고 ‘아무에게나 궁을 쓰자’고 했을 텐데. 그러면 상대가 노틸러스에 시선이 쏠리는 순간 나를 놓쳤을 것이고, 그때 내가 베인이나 칼리스타를 궁극기로 걷어찼다면….”
라이엇 게임즈 제공

-T1전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봤나.
“상대가 누군지를 떠나서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적은 우리 자신이라고 여겼다. 경기 앞두고 감독님께서 ‘주눅 들지 마라. 네가 상대보다 잘한다. 더 잘하고 오라’고 말씀해주셔서 동기 부여가 됐다. 나 또한 상대방을 존경하게 되거나, 상대가 나보다 잘한다는 ‘루저 마인드셋’을 가지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팀이 준비해온 것에 비해 쉽게 떨어진 것 같아서 아쉽다.”

-첫 국제대회를 통해 생소했을 여러 지역의 팀들과 스크림·실전을 치렀다.
“게임을 보는 시야가 트였다. 많이 배웠다. 스크림에서 G2, BLG가 급이 다른 게임을 보여줬다. 젠지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우승 후보인) T1은 대진 때문에 한동안 스크림을 하지 않았다. 그들과의 스크림을 통해 많이 배웠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구나’ 싶더라. 심지어 우리가 이긴 게임에서도 많이 배웠다.”

-이번 대회를 통해 배운 것들이 서머 시즌에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질까.
“서머 시즌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서머 시즌부터는 라인 스와프가 없어질 거라고 예측하고 있다. 오늘 T1전만 해도 라인 스와프 전략을 열심히 준비해왔다. 이제 다시 정상 라인전 메타로 돌아갈 것 같으니 다시 기본을 연습해야 한다. 대회 탈락이 확정된 김에 얘기하자면 우리 팀도 라인 스와프 때문에 대회 내내 많이 고전했다. 우리 팀도 정상 라인에 강점이 있는 팀이었다.…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라인 스와프는 오늘 경기에서도 리퀴드가 T1을 위협한 요소 중 하나였다.
“사실 우리 팀만의 라인 스와프 연구 내용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BLG와 T1의 경기를 봤다. BLG의 유연함, 라인 스와프 셋업이 엄청나더라. 스와프 전략의 50%는 BLG 대 T1 경기를 보면서 카피했다. 실제로 오늘 경기에 그들의 전략을 적용했는데 잘 먹혔다. 물론 T1도 BLG전 이후 대처법을 준비해왔으므로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선수로서 라인 스와프가 괴로운 건 3~5초 사이에 판단의 결괏값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3초 전에 옳았던 판단을 쭉 밀고 나갔다가 게임이 그대로 끝나버리기도 한다. 바뀐 결괏값을 인지하지 못해서 진다는 게 때로는 불합리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을 정도다.”

-BLG의 특별함은 일반 시청자들이 알아채기 어려운 수준일까?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일반 시청자분들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와드 세팅이 뛰어나다. 우리 팀은 이걸 체크메이트 포지션이라고 부른다. 1레벨부터 와드를 영리하게 설치해서 상대 정글러를 망하게 만든다.
BLG가 구축한 전략은 라인 스와프 과정에서 아무도 완전히 망하지 않는 것이 골자다. 라인 스와프를 했을 때 누군가가 조금 망하는 건 상관없다. 그런데 한 명이라도 ‘폭망’하면 크게 불리해진다.
또한 상대가 스와프를 하거나 정글 지역에 들어왔을 때 5명의 순간 판단력도 정말 뛰어나다. 5명 각자의 움직임이 모두 좋다. 이 인터뷰를 보신 뒤에 T1 대 BLG전 3세트를 다시 시청하신다면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실 것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동서양의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데 동의하는지.
“나는 솔직히 격차가 좁혀졌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북미에서 활동하지 않았으니까 전년도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우리가 속된 말로 동양에 ‘발리는’, 무조건 0대 3으로 지는 리그와 팀은 아니라고 느꼈다.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얘기하고 싶진 않다.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들(동양권 강팀들)의 상황 판단력을 배우고 흡수하면 될 것 같다. 코치님께서도 ‘G2는 몇 년 동안 그들의 방식을 관철해온 끝에 TES를 3대 0으로 이겼다. T1은 수년간 그들의 방식을 갈고 닦아서 월즈 챔피언이 됐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그런 팀을 흔들었다. 우리도 우리만의 길을 걷는다면 수년 뒤에는 그들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나도 동의한다. 우리는 반드시 동서양의 격차를 좁힐 수 있다.”

청두=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많이 본 기사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