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반대 뚫고 반공포로 석방한 이승만 …배경엔 1만 6000명 개종 역사”

“미군 반대 뚫고 반공포로 석방한 이승만 …배경엔 1만 6000명 개종 역사”

김재동 하늘교회 목사, 14일 열린 샬롬나비 워크숍에서 논문 발표

입력 2024-06-16 11:50 수정 2024-06-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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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24사단 제19연대 군인이 1951년 3월 7일 서울에서 생포한 중공군의 몸을 수색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6·25전쟁 74주년이 눈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친 이승만 대통령을 조명하는 연구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끈다. 김재동 서울 은평구 하늘교회 목사는 14일 서울 서초구 샬롬나비 사무실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정의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논문 발표에 나섰다.

1953년 6월 8일 미국은 반공포로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무시하고 북한과 중공을 상대로 포로 교환협정에 서명한다. 이틀 뒤 이승만 대통령은 군 수뇌들과 현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경무대로 부른다. 그리고 반공포로들을 풀어주는 방안을 비밀리에 검토한다. 그리고 6월 17일 이 대통령은 원 장군에게 포로들의 즉각 석방을 명령한다.

6월 18일 국군헌병대는 각 포로수용소 철망을 절단한다. 헌병들은 호주머니에 고춧가루와 모래를 넣어 뒀다가 달려드는 미군의 얼굴에 뿌려 제지했다. 김 목사는 “헌병들은 이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3년 동안 우리를 위해 싸워준 미군을 제압하고 부산 대구 영천 마산 광주 논산 부평 등 각 수용소에서 2만7389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며 “이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승만은 18일 오전 11시 공식 성명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국제법으로 정당함을 밝혔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이 사건의 배경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를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꼽았다. 전쟁 발발 후 겨우 반년 뒤인 1950년 12월경 북한군 인민 포로는 14만명에 이르렀다. 이듬해 2월 설치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17만명에 육박하는 포로들이 수용됐다. 이후 전쟁포로 송환 협상이 진행됐지만,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반공포로가 등장한다. 김 목사는 “중공군 포로를 포함한 16만9983명 가운데 과반이 되는 8만여명이 송환을 거부했다”며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반공 기독교인 포로들은 환송을 막아달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애절하게 호소했다”고 말했다.

포로들이 강제송환을 거부한 데는 유엔군 군목이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해롤드 보켈(Harold Voelkel)과 그의 지시를 받아 포로수용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임한상 김윤찬 강신정 임재수 박지서 남기종 강응무 등 한국인 목사들의 역할이 컸다는 게 김 목사의 분석이다. 김 목사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군 내 종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종제도가 이미 도입됐다”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활동에 있어서 한국인 목사들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상규 전 고신대 명예교수(교회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포로수용소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이념적 대립은 폭력과 살인을 동반했다. 이런 곳에서도 간이 천막을 치고 전도하며 집합 예배를 인도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포로로 잡혀 온 임한상 목사였다. 임 목사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주일예배를 시행했다.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들조차도 위난한 환경에서 집합 예배를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비난했으나, 점차 신뢰를 얻었다. 1950년 성탄절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 속에서도 울타리 없는 야외에서 4천 명의 포로들과 함께 감동적인 성탄 예배를 드렸다. 옥호열 선교사가 거제도에 도착한 때가 바로 이 성탄 예배 직후였다. 목숨을 건 예배는 결국 포로 선교의 기초가 됐고, 그 결과로 6천 명의 인민군 포로가 회심했으며, 2266명의 인민군 출신 포로가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642명의 포로가 장로교 감리교 혹은 성결교 신학교에 입학하려 했다. 임한상 목사와 옥호열 선교사의 전도와 예배 인도로 인해 반공 기독교인 포로의 수가 증가했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과감한 정책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8월 7일 미국 특파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 국가기록원 제공

김 목사는 “포로수용소 안에서의 선교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만 1만6000명이 넘는다”며 “포로들에 대한 선교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 및 커뮤니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미국과 한국의 선교사들이 포로수용소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 공부를 한 결과 포로들은 전쟁의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은 국가의 외교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깊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책 결정을 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선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특히 전쟁 중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신앙적 전투로 간주한 점을 언급하며 “이는 그가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한국의 안보와 정치적 독립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 후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고신대와 경인여대에서 한국 근현대사 강사로 일했다. 대한역사문화원장, 6·25 격전지 탐방 코디네이터, 자유리더캠프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한편 샬롬나비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을 기념해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는 자리로 워크숍을 마련했다. 개회 예배에서는 이일호 박사(칼빈대 은퇴 교수)의 사회로 김중석 목사(사랑교회 원로, 북한교회 바로 세우기 연합 사무총장)가 ‘절대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샬롬나비 회원들이 14일 서울 서초구 샬롬나비 사무실에서 워크숍 후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샬롬나비 제공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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