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 첫 창조론 강의, 괴테 박사 아시나요?… 26년간(1961∼87) 한남대서 교수 선교사로 사역

한국 대학 첫 창조론 강의, 괴테 박사 아시나요?… 26년간(1961∼87) 한남대서 교수 선교사로 사역

이정순 교수, 그의 삶 조명 논문… 1976년 ‘성경과 과학’ 강의 한국창조과학회 설립 초석 돼

입력 2015-04-14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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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한남대 화학과 교수였던 로버트 괴테 박사(아랫줄 가운데)가 리더십 훈련을 받은 학생들과 촬영한 사진. 학생들은 지금 학계와 교계에서 활동 중이다. 이정순 교수 제공
그는 양복저고리 포켓에 항상 볼펜 2개를 꽂고 다녔다.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는 학교에서 지급한 볼펜을 사용했고, 개인적으로 기록할 때에는 자신의 볼펜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헌 가방과 헌 양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수업 준비에도 철저했다. 1년 전부터 강의 내용을 준비했으며 1시간 강의를 위해 3시간을 투자했다. ‘평생 새 옷을 입지 않을 것’ ‘공(公)과 사(私)를 지킬 것’ 등은 그의 철칙이었다. 한국 대학 최초로 창조론 강의를 시작해 한국창조과학회 태동에 초석을 놓은 전 한남대 화학과 교수이자 선교사. 로버트 괴테(86·한국명 계의돈) 박사 이야기다.

백석대 이정순(선교학) 교수는 13일 “1884년부터 1994년까지 2956명의 내한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했음에도 6·25전쟁 이후부터는 이들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라며 “괴테 박사는 한국 화학 발전에 기여하고 창조과학회 설립에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공로가 크다”고 밝혔다. 괴테 박사의 삶은 최근 이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 이후 선교사 괴테 박사의 사역과 삶에 대한 고찰’(복음과선교, 29호)로 재조명을 받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괴테 박사는 1961∼1987년 한남대 화학과에서 교수로 활약한 남장로교(PCUSA) 선교사였다. 그는 세계 최초로 나일론 섬유를 개발한 듀퐁사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며 자가용 경비행기까지 소유하는 등 상류층 삶을 구가했다. 하지만 29세 때 자신이 조정하는 경비행기가 추락, 살아나면서 인생의 의미를 고민했다. 이후 듀퐁사를 그만두고 버지니아주 기독교교육 장로교학교에서 1년간 훈련 받았다. 그러던 중 한남대 초대 학장이었던 윌리엄 린튼(인돈) 박사로부터 화학과 설치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 1960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이듬해부터 26년간 교수로 활동하며 교육과 선교, 생활로 예수를 증거했다. 그는 6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한 과학교육제도를 국내에 적용했다. 또 한남대 학생뿐 아니라 국내 중등교사에게도 연수 기회를 주었다. 1966년에는 국내에 첫 자연과학연구소를 설치해 오늘날 대학 내 연구소 설립을 선도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돕기도 했다.

괴테 박사는 특히 1976년 ‘성경과 과학’ 과목을 개설, 한국 최초로 창조론을 가르쳤다. 이정순 교수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진화론이 일반화돼 학생들이 신앙과 과학을 이원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며 “창조론 강의는 기독교세계관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고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 설립에 초석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전도와 리더십훈련, 성경 공부를 통해 1300여명의 학생들과 수십명의 교직원들을 기독교 지도자로 양성했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받는 것을 경계해 1987년 한국을 떠난 이후 대학 측의 계속적인 초청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진이 학교에 걸린 것을 전해 듣고 “벽에 붙은 사진은 없애 달라.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 때 선교사직을 그만두고 성서연구연합회 연구원으로 일했다. 무신론과 진화론의 도전을 받았던 미국교회를 돕기 위해서였다. 1995년부터 99년까지는 미국 창조과학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의 자녀들은 2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사위는 1981∼83년 한남대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한국에서 성장한 큰아들은 목사로 한인 2세를 위해 목회하고 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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