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4) 감리교 정동 선교부지 확보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4) 감리교 정동 선교부지 확보

윌리엄 스크랜턴, 감리교 선교사로 서울에 첫발

입력 2015-04-2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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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랜턴 가족이 머물던 서울 정동의 주택 인근 모습을 삽화로 그린 그림으로, 삽화의 ①번이 병원, ②번이 사택 건물이다. 이 그림은 1887년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부가 발행한 선교 잡지 ‘The Heathen Woman’s Friend’에 실렸다. 이덕주 교수 제공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는 1884년 10월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하고 있던 윌리엄 스크랜턴을 의료 선교사로 선발했고, 12월에는 뉴저지 드루신학교 졸업생 헨리 아펜젤러를 교육 선교사로 선발했다. 여기엔 해외여선교회가 파송한 메리 스크랜턴이 포함됐는데 메리 스크랜턴의 근본 선교 목적은 ‘여성 선교’였지만 우선적으로는 한국 정부에서 허락한 ‘여자 학교’ 설립을 염두에 두었다. 이로써 스크랜턴과 아펜젤러, 두 가족으로 ‘한국 감리교 개척선교사단’이 구성됐다.

개척선교사단의 책임자는 아펜젤러가 맡았다. 그는 스크랜턴보다 두 살 아래였으나 감리교 측은 신학교를 졸업한 아펜젤러에게 관리를 맡겼다. 스크랜턴은 이런 결정을 받아들였고 아펜젤러를 신뢰했다. 이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두 개척 선교사 사이의 동역과 협력은 아펜젤러가 순직하는 1902년까지 계속됐다.

한국 개척선교사단은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해 27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했다. 스크랜턴과 아펜젤러는 곧장 한국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두 달 전 발생한 갑신정변 때문에 한국행이 쉽지 않았다. 마침 도쿄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망명해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한국어도 배웠다. 스크랜턴 가족의 어학교사는 박영효였다. 국왕의 조카사위로서 선교사들로부터 ‘왕자’ 칭호를 받았던 그였다. 스크랜턴 가족은 한국의 최고위층으로부터 고급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한국 감리교 개척은 스크랜턴이 앞섰다

입국 시기를 논의하던 선교사들은 불안한 한국 정세를 고려해 2단계로 나누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직 자녀가 없던 아펜젤러 부부가 1진, 가족이 많은 스크랜턴이 2진을 맡기로 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 요코하마를 떠나 28일 나가사키에 도착, 다시 배를 갈아타고 3월 31일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미국 북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도 같은 배를 탔다. 이들은 4월 5일 오후 3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서울행은 어려웠다. 제물포항에는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미국 측이 보낸 군함 오씨피호가 정박해 있었는데 함장 맥글렌시는 아펜젤러 부부, 특히 부인의 서울 입경을 강력하게 만류했다. 미국 공사 포크 역시 항구를 벗어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언더우드만 서울로 들어갔고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에서 5일을 머물다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 두 달을 기다렸다. 이로써 한국 감리교 선교개척은 2진을 맡기로 한 스크랜턴의 몫이 됐다.

2진은 스크랜턴만 들어갔다. 마침 갑신정변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나온 미국무역회사 대표 타운젠드로부터 여성만 대동하지 않는다면 서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크랜턴은 4월 20일 요코하마, 28일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5월 3일 주일,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도착했다.

분위기는 안정적이었다. 미국 공사는 의사인 스크랜턴을 환영했다. 알렌도 제물포까지 내려와 스크랜턴을 영접, 5월 6일 그를 데리고 정동 사택과 미국공사관, 제중원을 보여줬다. 스크랜턴은 임시로 알렌의 정동 사택에 머물며 제중원 일을 도왔다. 스크랜턴은 당장 감리교 차원의 독립 의료사역을 시작하기보다는 알렌의 병원 일을 도우면서 어학공부와 선교 준비를 병행했다. 스크랜턴은 이러한 뜻을 알렌에게 전했고 미국공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자신을 (알렌과 동등한 자격의) 국립병원 의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내 백성’을 위해 부지를 확보하다

아들의 서울 정착 소식을 접한 메리 스크랜턴은 별도로 자신을 파송한 해외여선교회에 일본에서의 준비생활을 알렸는데 그것이 1885년 해외여선교회 연례보고서에 실렸다. 메리 스크랜턴은 보고서에서 한국인을 ‘내 백성(my own people)’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스크랜턴 부인은 자신도 속히 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를 위해서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 정부의 허락뿐 아니라 사역의 기반이 되는 주택과 선교부지 마련이 시급했다. 아들 스크랜턴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는 이것이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서울 입경 후 한 달 만에 알렌의 집 건너 편 언덕에 부지와 주택을 확보했다. 지금의 정동 33번지 정동제일교회 사회문화관이 위치한 곳으로, 양반 소유의 기와집과 부속토지였다. 당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이 매매를 확인하면서 스크랜턴에게 보낸 빙문(憑文)에 따르면 이 집은 본래 정동 거주민 김씨 소유로 ‘100간(間)’ 규모의 큰 기와집이었다.

스크랜턴이 나머지 가족과 합류한 것은 6월 20일이었다. 당시 배에는 아펜젤러 가족과 스크랜턴 가족, 헤론이 동승했다. 아펜젤러는 서울 집이 마련될 때까지 한 달 가량 인천에 더 머물렀고, 스크랜턴 가족은 곧장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메리 스크랜턴과 며느리 루이자 스크랜턴은 선교사 신분으로 들어온 첫 번째 미국 여성이 되었다. 감리교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여성 선교의 선구자’란 칭호가 붙여진 이유다.

메리 스크랜턴은 아들집에 머물며 선교부와 별도로 ‘여성 선교부’ 소유 선교 부지 확보에 힘썼다. 아들이 확보한 정동 땅은 엄밀하게는 미 감리회 해외선교부 ‘남성 선교부’ 소유 부지였다. 그래서 부지를 얻기 위해 애썼고 10월, 초가집 21채와 주변 부지를 확보했다. 이로써 미 감리회는 한국에 개척 선교사를 파송한 지 10개월 만에 1만여 평 규모의 선교 부지를 마련하고 스크랜턴의 병원과 아펜젤러의 남자학교, 그리고 스크랜턴 부인의 여자학교 사역을 전개할 기반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

한국교회는 유난히 ‘최초’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최근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중에서도 누가 먼저 도착했느냐를 놓고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선교사 당사자들은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처음’ 논쟁은 ‘나중’ 사람들의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개척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해 서로 협력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국민일보 문서선교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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