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빗방울의 기억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빗방울의 기억

입력 2016-07-21 18:27 수정 2016-07-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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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유리창이든, 나뭇잎이든, 아스팔트 도로든, 어딘가에 자꾸 부딪혀야 존재가 증명되는 것은 아닐까.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궁금해한다. 내가 처음 비를 맞은 것은 언제일까. 기억나지 않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물방울이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것 같다.

하필이면 수업이 끝나는 시각에 딱 맞춰 소나기가 쏟아져서 신발주머니를 들고 학교 현관에 멍하니 서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준비성 있게 우산을 챙겨온 아이들이 떠나고, 어머니나 삼촌 이모들이 데리러 온 아이들이 다음 차례로 사라진다. 용감한 아이들이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려가고, 올 사람은 없지만 그냥 막연히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아이들 몇 명이 남는다. 맨 마지막으로 남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마침내 나도 빗속으로 달려 나간다.

빗방울이 팔뚝과 어깨에 부딪치고, 얼굴을 때리고, 머리카락이 젖고, 옷이 몸에 달라붙는다. 등허리로 빗물이 흐르고, 코끝에서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나고, 입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어오고, 속옷이 젖고, 양말이 젖고, 드디어 내 몸에서도 빗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면 웬일인지 움츠리고 있던 등이 쭉 펴진다. 이제 달리지 않아도 된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아도 되고,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침착한 마음이 되어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어 더 크고 넓은 사람이 된 느낌이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밖에서 옷도 신발도 다 벗고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어쩐지 서럽지만, 힘든 일을 해내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영웅이라도 된 듯, 서러워서 더 자랑스럽다.

흠뻑 젖을 때까지 비를 맞고 달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이제는 일부러 우산 없이 빗속을 달린다 해도, 남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가거나 어디서 잠시 비를 피할 주변머리도 없던 그 아이로 돌아갈 수 없지만. 더 큰 사람이 된 듯 서럽고도 자랑스러웠던 순간이 다시 오지도 않겠지만.

부희령(소설가)

아직 살만한 세상